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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XXer : not just brothers

[백도] broXXer - 7

어느덧 지하 1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가 앙다문 문을 열었다. 야윈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쥔 백현이 창백하게 질린 경수를 이끌었다. 좀 전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와 같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원한다면 뿌리칠 수 있을 만큼 가뿐한 악력이었다. 하나 경수는 거부하지 않았다. 하얀 아우디로 다다를 때까지 앞서가는 백현의 너른 등을 그저 멍하니 뒤따르기만 했다. 여느 때처럼 조수석에 오른 경수는 이후에도 좀체 말문을 열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잿빛 도로를 달리는 내내 오로지 침묵만 삼킨 채 차창만 내다봤다.

겨울이 만연한 도회지의 채도는 여타의 절기보다 낮았다. 봄처럼 온화한 바람을 끌어와 예민한 꽃들을 얼러 곳곳마다 만발을 돕는 날도 아니었고, 여름처럼 뙤약볕을 데려와 뭇 잎사귀의 영혼인 녹음을 푸르게 북돋아 주는 것도 아니었으며, 가을처럼 황혼이 잦아 불그스름한 노을빛으로 익힌 잎을 점점홍 퍼뜨려주는 일도 없었다. 하루의 수명이 부쩍 짧아진 태양은 아무리 빛을 짜내도 다른 계절에 비해 흐렸다. 경직된 건물 아래 인도를 거니는 몇 사람들의 차림도 대개 어두웠고, 외측을 따라 줄지어 선 가로수는 죄다 이파리 없이 뾰족한 가지만 남아 뼈처럼 앙상했다. 그 밑엔 실신한 낙엽들이 갈색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간혹 시각적으로나마 포근하게 꾸민 카페와 음식점들이 듬성듬성 있었지만, 영업시간 전인지라 불이 꺼져있어 그마저도 황량하기만 했다.

그만큼 따따한 온기가 간절한 절기에, 해묵은 외사랑마저 잃었다.

본디 그런 철이었다. 온(溫)의 부재와 생기의 실종이 판을 치고, 만물은 잦은 상망에 시달리는 허실의 철이었다. 이런 날 애별을 치르기엔 극악이지 않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병이 되는 법이라, 곧 독감까지 앓을 테니. 그럼 나는 앞으로 얼마나 아프게 될까. 꼬박 사 년 치 애념을 품었으니 차후 사 년은 더 괴로울까. 막연히나마 투병의 길이를 가늠해본다. 돌이켜 보면 새삼 오랜 세월 버둥질쳤다. 형으로서 동생에게 사하는 애정이 아닌, 변백현으로서 도경수를 사랑해달라며 갖은 애를 썼다. 한데도 처참히 실연했다. 따지고 보면 형을 좋아한다고 자각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숱한 거절을 되받았다. 다만 어제오늘을 못 견디겠는 이유는, 마냥 포용해주던 백현이 돌연 본인의 품을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품을 온실 삼아서 자라난 화초가 갑작 엄동설한으로 버려진 격이었다. 차차 얼어붙는 기분. 이대로 심장까지 동상에 에이면 힘없이 이울어버릴 것 같았다. 최악의 말로였다. 줄곧 얌전하던 경수의 진한 눈썹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와 동시, 차내 공기를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페로몬도 사뭇 변조되었다. 감정은 호르몬과 직결되어있고 호르몬은 곧 페로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빗물에 젖은 양 축축했던 튜베로즈의 향내가 삽시간 탁해졌다. 슬픔보다 더 아래의 감정에서 내배는 페로몬은 꽤 독한 내음을 풍겼다. 왼손등에 뼈대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핸들을 꽉 움켜쥔 백현이 느리게 차를 세웠다. 어느덧 교외 후문 앞이었다. 등교 시간은 낙낙히 남아 학생 주임도 선도부도 서 있지 않았다. 한산하다 못해 허했다.

매한가지로 오가는 대화 한 점 없는 차 안엔 월하향만이 흐드러져 있었다. 운전석 측 창문만 살짝 내려 환기를 시켜도 무용했다. 창밖으로 빠져나가는 양보다 경수의 살갗으로부터 방출되는 꽃잎이 더 다분했다. 모든 게 걱정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껏 베타로 살아온 경수에게 억제제가 익숙할 리 없었다. 하여 확인차 계단에 앉아서 경수를 기다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페로몬으로 흥건해 엘리베이터에서 경로를 바꿨다. 페로몬을 조율하지 못하는 경수가 이대로 학교에 간다면 작일과 동일한 사달이 벌어질 게 뻔했다. 어쩌면 경수를 탐냈던 그 애새끼가 벼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하거늘. 습관처럼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씹던 백현이 조수석의 경수에게로 이목을 돌렸다.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그는 여태 볼 것 없이 호젓한 교문을 건너보며 저를 외면하고 있었다.

“… 경수야.”

오랜 묵언으로 인해 잠긴 저음이 고즈넉하게 울렸다. 그러자 차창 쪽으로 고개를 튼 경수의 긴 속눈썹이 한 번 팔랑인다. 넋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분명 부름을 듣기야 했으나 반응은 눈 깜빡임이 고작이었다. 으레 부르면 말간 눈망울을 반짝였던 경수는 창 너머 휑한 겨울만 주시했다. 아무래도 심사가 단단히 뒤틀린 기세였다.

“…… 아가.”

제풀에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삭힌 백현이 다시 한번 경수를 불렀을 때였다. 시종 도외시하던 경수가 돌연 백현을 돌아보았다. 이형의 눈이 마주쳤다. 다행히도, 다시 맞닥뜨린 경수의 하야말간 낯빛은 평상시와 같았다. 큼지막한 눈망울을 똘망똘망 치켜떠 미묘하게 당돌한 표정. 그 아래로 새침하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벙끗 열렸다.

“알아요.”

“…….”

“내 마음과는 별개로 형 입장 십분 헤아릴 수 있어요. 형이 보는 내 등 뒤엔 아직 우리 엄마가 보일 테고, 현실적으로 열 살 터울 미성년자랑 연애라니 턱도 없죠. 우리 형은 준법정신까지 투철하니까.”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센터 콘솔을 짚은 경수가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마치 백현이 기껏 그어둔 무형의 선을 넘듯, 눈을 똑바로 직시한 채 남은 팔을 슬며시 뻗었다. 성마른 손이 도드라진 미목으로 다가왔다. 그러한들 백현은 피하긴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원체 무덤덤한 얼굴 그대로 경수를 지그시 지켜보기만 했다. 손 놓고 있는 틈을 타 동그마한 지첨이 백현의 얇은 금테 안경을 쥐고 살살 벗겨냈다. 청초하게 드러난 민낯은 과연 사날없이 냉랭했다.

“그게 섹시하긴 한데요, 형.”

“…….”

“난 그거 다 깨부수고 싶더라.”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진 목소리가 나른하게 속삭인 직후였다. 백현의 매끈한 목을 두 팔로 거머안은 경수가 부지불식간 입을 맞췄다. 도톰한 앵순이 벌어져 얄캉한 입술을 삼켰다. 입 안에 들어온 가느스름한 입매를 작고 단단한 이빨로 가볍게 감쳐무니, 백현의 여린 살점에 유재한 상처가 느껴졌다. 간날 저를 겨눈 정욕을 감내하느라 백현 스스로 짓이겨놓은 흔적이었다. 이렇게나 날 아껴주고 싶었을까. 따끈히 젖은 혀를 내어 백현의 피딱지를 정성껏 어루핥자 돌기를 통해 굳은 피 특유의 비릿함이 감돌았다. 당혹감에 굳어있던 백현이 그제야 움찔했다.

“잠깐….”

“… 우응….”

정신을 차린 즉각 물러나려 했으나 덜미에 걸쳐진 양팔로 인해 뒤로 빠질 수가 없었다. 경수의 말캉한 혀가 기어이 입 속을 침범했다. 마른 뺨에 옅은 홍조를 띤 백현이 고운 미간을 슬쩍 구기며 날렵한 눈매를 좁혔다. 발갛게 익은 경수는 발칙하게도 눈까지 내리감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았던 페로몬이 전날만큼이나 향기롭게 꽃폈다. 곤란하게도, 입맞춤으로 인해 흥분한 기미였다. 순 제멋대로 들어온 살덩이를 차마 깨물 수 없어 혀로 밀어낸들 소용없었다. 외려 제 혀끝을 빨아올리는 통에 맞닿은 입술 사이 축축한 마찰음이 곱절 끈적하게 흘러나왔다. 귓전을 자극하는 소리가 퍽 야스러웠다.

그예 경수의 두 팔을 그러쥔 백현이 힘으로 그를 떼어냈다. 맞물려 있던 입술도 비로소 떨어졌다. 버티고 싶어도 백현의 완력을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잘록한 양쪽 손목을 저당 잡힌 경수가 색색 숨을 가누며 배시시 웃는다. 예의 하트 모양으로 벌어지는 입술이 탐스럽도록 붉게 익어있었다.

“미안하지만 형.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 없어요.”

방금의 입맞춤으로 인한 고양감이 도사린 음성이었다. 붙들린 오른손으로 고개를 튼 경수가 여태 쥐고 있던 백현의 안경을 썼다. 얇고 둥근 테 안경이 경수의 곱상한 외관에도 썩 잘 어울렸다. 재개 백현에게로 눈길을 돌린 경수가 나슨히 풀어진 성색으로 뒷말을 마저 이었다.

“형이 말한 그 적당하다는 선, 지킬 자신이.”

방금 입 맞춘 백현을 향해 보란 듯, 새빨간 혀를 내뺀 경수가 투명한 타액으로 반들거리는 앵순을 핥았다. 그 낯이 언뜻 선정적이었던 터라 괜스럽게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매혹적인 튜베로즈의 향으로 인해 또다시 배꼽 아래가 저릿해졌다.

 

 

교내 스피커에서 짤막한 음악이 울렸다. 자습이었던 2교시의 쉬는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감시하던 선생은 교실을 나가고 아이들은 기지개를 켜거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리 정숙하던 교실의 공기가 슬슬 부산스러워지는 와중 경수는 문제집 귀퉁이에다 사소한 낙서를 남기고 있었다. 샤프의 흑심을 따라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심어졌다. 그것을 지그시 내려다보자니 제풀에 웃음이 배어났다. 올라간 입꼬리에 희뽀얀 볼도 봉긋 솟았다. 금일 아침, 저를 바라보는 백현의 두 눈이 답지 않게 흔들렸다. 아주 잠깐에 불과하여 금방 본위를 되찾았으나 그에게 미동을 선사한 것만으로도 꽤 뿌듯했다. 입맞춤의 여파로 은연히 당황한 시선 아래, 꽃무릇 화판처럼 붉게 농익었던 얇은 입술. 저로 인해 흐트러졌던 숨소리까지 되뇌는 중이었다.

“야, 도경수-.”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도 저를 괴롭혔던 양아치, 최석훈의 것이었다. 입가에 낙낙하던 웃음기가 일순간 싹 씻겨 내려갔다. 커다란 눈 끝을 삐죽 세운 경수가 껄렁한 걸음으로 접근하는 석훈을 노려봤다. 넥타이도 없이 셔츠 앞섶을 헤친 행색은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저 새끼는 알람 맞춰놨나 왜 2교시마다 지랄이야.

“오늘도 페로몬 폴폴 풍기고 다니네.”

멋대로 옆자리에서 의자를 끌어온 석훈이 옆자리에 앉아 어깨동무를 걸었다. 친근한 척 어깨를 짓누르는 상박이 무거웠다. 함부로 밀착해 오는 몸이 짜증을 돋웠다. 눈살을 찌푸린 경수가 석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문제집을 덮었다. 노골적인 무시였다. 한데도 석훈은 굴하지 않았다. 팔에 힘을 주어 경수를 끌어당긴 석훈이 입술을 불쑥 들이민 채 귀엣말을 속삭였다.

“저의가 뭐냐. 우리 반에 알파라곤 나밖에 없는데.”

“…….”

“혹시 나한테 따먹히고 싶어서….”

질 낮은 패담이 도를 넘은 등시였다. 다 쓴 필기도구를 조용히 정리하던 경수가 방금 덮어둔 문제집을 들어 석훈의 뺨을 올려쳤다. 미끈미끈하게 코팅된 문제집으로 세게 얻어맞으며 철썩! 맵찬 소음이 울렸다. 저들끼리 놀던 반 아이들 몇의 눈이 석훈과 경수에게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타격에 알알한 광대뼈 부근을 감싸 쥔 석훈이 눈을 부릅떴다.

“아, 씨발!”

의자가 우당탕 넘어가도록 벌떡 일어난 석훈이 성에 못 이겨 경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드센 악력에 상체가 딸려갔다. 씨근덕거리는 석훈과 강제로 마주하게 된 경수의 하야말끔한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를 향해 손을 올린 석훈이 홧김에 내리치려던 그때였다. 싸늘하게 식은 튜베로즈의 꽃내음을 자아내던 경수에게서 불현듯 우성 알파 향이 훅 끼쳤다.

“뭐… 뭐야.”

치켜든 팔로 코를 막은 석훈이 경황실색한 채 경수에게서 한 걸음씩 더듬더듬 물러난다. 노기에 찼던 인상이 금방 괴롭게 일그러졌다. 스산한 새벽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백단나무가 세첨한 가지 끝으로 호흡기 점막을 긁어내리는 듯했다. 전날에도 맡아본 적 있는 페로몬이었다. 더럭 날렵한 눈으로 저를 깔보는 시선이 떠올랐다. 홀연히 나타나 개방 한 번에 너끈히 무릎 꿇게 한, 손 따위 쓰지 않고 고상하게 목을 졸랐던, 그 남자다. 그 남자가 페로몬을 아로새겨놓은 것이다. 알파가 자신의 오메가를 엄호할 때처럼, 경수를 건들지 못하도록.

“와, 존나… 빡세네…….”

폐까지 아려서야 기침을 쏟아내기 시작한 석훈이 급기야 허리를 굽힌 채 구역질했다. 그럼에도 가시처럼 예리하게 박힌 백단향의 페로몬은 속에서 게워지지 않았다. 휘청거리던 그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거진 각혈할 기세로 콜록거리는 석훈의 주변으로 동요한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소란이 파동처럼 번져가는 가운데, 경수는 홀로 가만히 앉아 동글동글한 눈만 끔뻑대고 있었다. 등등하던 석훈이 급작 꼬꾸라졌다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기침 전에 코를 막았으니, 페로몬 때문인가. 짐작대로 팔을 든 경수가 동그스름한 코끝을 손목쯤 묻고 킁킁거렸다. 마비된 후각을 통하여 익숙한 나무 냄새가 뭉근히 배어났다. 산뜻하니 마냥 싱그럽기만 한 향취는 백현의 페로몬이었다. 근데… 대체 언제 묻은 거지? 고개를 떼어낸 경수가 제 손목 안쪽을 멀뚱히 응시했다.

“…… 아.”

복숭앗빛 통통한 입술이 야트막하게 벌어져 작은 탄성을 흘렸다. 양쪽 손회목을 그러쥐었던 고운 옥수, 백현의 가늘고도 늘씬한 손가락. 페로몬을 칠할 만한 최적의 여지는 당시뿐이었다. 목에 걸쳐진 저의 손목을 한 줌에 다잡고 제압한 찰나, 백현은 페로몬을 남겼다. 이외엔 달리 마뜩한 접점이 없었다. 뇌리에 남은 장면을 곰곰이 되감던 경수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허탈한 소성 터져 나왔다. 이번엔 완벽히 놀라게 했다고 생각했거늘, 백현은 또 한 수 앞서 있었다.

 

 

***

 

 

모처럼 따사로운 조양이 만천을 푸근하게 물들인 아침이었다. 전날 밤 암막 커튼을 꼼꼼하게 쳐두었어도 환한 방 안, 침대 위에 쓰러져 곤한 숨만 내쉬던 백현이 별안간 눈살을 찡긋했다. 어렴풋한 의식과 설깨어난 육감으로 불현듯 알싸한 느낌이 점점 강하게 박였다. 감긴 눈꺼풀 위에는 볕뉘가 한창인 반면, 이른 시각마다 늘 시끄럽던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깨닫는 즉시 눈이 번쩍 뜨였다. 속히 팔꿈치를 세워 상체를 지탱한 백현이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 화면 하단을 눌렀다. 옅은 진동과 등시 환하게 켜진 액정 속 시간은 8시. 출근 시간에다 목요일이었다.

“…….”

하나, 연이어 날짜를 확인한 백현이 낮게 탄식했다. 금일은 12월 25일. 공휴일인 크리스마스였다. 이따금 자각하지 못할 만큼 깊이 잠들었을 때 벌어지는 통근자의 비애였다. 맥이 탁 풀렸다. 반쯤 일으킨 몸을 기울여 도로 자리에 풀썩 누운 백현이 천장을 내다본다. 내심 소스라친 탓에 졸음도 싹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곱디고운 두 손이 그의 작달막한 만면을 숨기듯 감쌌다. 간밤 늦잠을 자기 위해 커튼도 빈틈없이 쳐놓고 알람까지 꺼둔 뒤 잠들었건만 제때 잘도 기상해버렸다. 또렷해진 정신에 다시 눈 감을 수도 없다는 걸 직감한 백현이 느지막하게 침대 위로 앉았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상체에 와닿는 공기가 다소 사늘했다. 이맘때 늘 하던 짓을 안 해서 그런가. 벌써 올해의 끝자락이라는 증명이 피부에 와닿아도 영 실감 나지 않았다.

매년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이면 산타를 대신해 경수의 머리맡에다 몰래 선물을 두고 갔었다. 처음 만난 해부터 지금껏 쭉. 작금은 월급으로 너끈히 사되 용돈을 차곡차곡 모은 적도 있었다. 그 덕에 경수는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중학생이 되어서야 또래 친구들로 하여금 깨달았다. ‘형아… 산타는 없대요….’ 여즉 초등학생 체구에 막 교복을 입은 꼬마가 조그만 두 주먹을 앙구고 울먹였지만 그래도 꾸준히 선물했다. 세상에 하얀 수염을 풍성히 가꾸고 빨간 코 루돌프와 함께 하늘을 나는 산타가 없다면, 제가 되어주면 될 일이니까. 그리하여 이제금 연말 관례에 가까웠으나 올해는 차마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제게 선을 지킬 자신이 없다며 입 맞춘 이후, 경수의 태도가 곱절은 더 앙큼해져 당최 틈을 내어줄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 쉰 백현이 이불을 걷고 침대를 벗어나 저벅저벅 문으로 향했다. 먼저 개운하게 씻고 끼니는 대충 때운 뒤, 단지 내 헬스장에서 운동이라도 할 계획이었다. 그럼 오전은 너끈히 소모하리라. 그리 다지고 안방 문을 연 참이었다.

“일어났어요, 형?”

뽀얀 허벅다리가 죄 드러날 만큼 짧은 반바지에 품이 큰 하얀 셔츠, 그 위로 앞치마를 두른 경수가 부엌에서 백현을 돌아본 채 반색했다.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방긋 웃는 얼굴이 해맑기도 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와 더불어 들고 있는 뒤집개를 말미암아 또 저 모르게 살금살금 요리한 모양이었다.

“…….”

이른 벚꽃이라도 퐁퐁 피워낼 듯한 경수를 무표정하게 응시하던 백현이 방문을 도로 닫았다. 쿵. 정 없이 잠금까지 걸어놓고 침대로 되돌아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계획은 전면 취소다. 억지로라도 잠들려 눈을 감자, 그만큼 살아난 청각을 통해 부엌에서부터 도도도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구태여 보지 않아도 저 말괄량이가 이제 뭘 할지 뻔했다. 지레 예견한 대로, 덜그럭거리던 문고리에서 툭- 간결한 소음이 들렸다. 실없다시피 손쉽게 잠금을 푼 경수가 안방 문을 벌컥 열었다.

“형아!”

신난 강아지인 양 왈칵 달려든 경수가 대뜸 이불을 걷더니 백현의 하복부 위로 주저앉았다. 댓바람부터 뭐가 그리 좋은지, 탐스럽게 만개한 튜베로즈의 페로몬이 물씬 끼쳤다. 차분하던 평소보다 훨씬 들뜬 상태였지만 이따금 있는 일이었다. 방금 요리를 마친 아이의 손을 확인하는 버릇마저 미뤄두고 부러 감은 눈을 뜨지 않으니 경수가 곧장 자세를 낮춘다. 탄탄한 뱃가죽과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끼리 비벼졌다. 무심코 움찔한 백현의 마른 뺨으로 경수가 입술을 기울인 순간. 눈을 뜬 백현이 두 손으로 경수의 옆구리를 붙들어 저지했다.

“어허.”

“치, 아쉽게….”

“내려와.”

“오늘은 안 해줘요?”

“뭘.”

덤덤히 되묻는 백현에게 경수가 시치미 떼듯 배시시 웃었다. 그가 매조마다 저를 데려다주며 은근슬쩍 묻혀주는 페로몬을 여태 모른 척 고분고분 받아왔다. 첫날 그의 향에 혼쭐난 석훈을 다그쳐 얻어듣길, 상대의 몸에 페로몬을 칠하는 건 살을 맞대야 하므로 통상 애인끼리 하는 행각이라 했다. 하여 백현은 제게 언질도 없이 페로몬을 새긴 것이었다. 혹 제가 헛된 가망이라도 품고 시달릴 봐. 물론 아는 티를 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을 테지만, 저 또한 의무적으로 손목을 내어줘야 했으리라. 그런 건 싫었다. 살 한번 닿지 않고 등교하고자 하면 붙잡아 오는 백현이 좋았다. 고로 모른 척했으나, 꼬리는 숨길 수 있을 만큼 적당히 긴 게 이로웠다. 촉이 기민한 백현이라면 머지않아 어떻게든 알아챌 테니. 이윽고 허리를 곧게 편 경수가 잔웃음 서린 낯으로 백현을 내려다보며 그의 왼 손목을 잡았다. 남은 손을 이용하여 앞치마와 셔츠를 한 데 잡고 들춰내자 감춰져 있던 새뽀얀 속살이 슬쩍 드러났다.

“또 내 몸에다가….”

잔망스럽게 말꼬리를 늘인 경수가 틈이 벌어진 옷 속으로 백현의 손을 천천히 이끌었다. 늘씬하게 빠진 손가락이 야윈 배에 닿고, 보드라운 살결을 지나쳐 점차 명치께로 올라왔다. 손의 외관은 누군가 정성 들여 공예를 한 듯 길고도 매끈할지언정 안쪽은 굳은살로 까슬하여 손길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뜨거운 백현의 체온에 전염이라도 된 양, 머리끝까지 열이 확 차올랐다. 마냥 해말갛던 뺨에 선홍빛 홍조가 고였다. 제멋대로 백현의 손을 빌려 스스로 애무하는 주제에 부끄러운 듯 안색을 붉힌 경수가 헤 벌린 입술로 마저 뒷말을 이었다.

“페로몬 가득 묻혀줘야죠, 형.”

붙든 옥수가 기어코 판판한 가슴 한복판에 달했을 때였다.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현이 얇은 입매를 샐그러뜨리며 실소했다. 열린 입 밖으로 한숨과 비슷한 소성이 하고 터져 나왔다. 그의 망가진 선홍빛 살점이 돋보였다. 시일이 꽤 지났는데도 아직도 아물지 않은 입술을 걱정할 즈음, 쥐고 있는 그의 팔목으로 돋아나는 힘줄이 느껴졌다. 그대로 경수의 몸을 밀어 눕힌 백현은 어느새 으레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가 진즉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도 그닥 놀랍지 않은 기색이었다. 코 끝이 닿을 것만 같은 지척에서 백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여우를 키웠지.”

“그래서 오늘은 안 해줘요?”

“필요 없잖아.”

무심한 음성으로 대꾸한 그가 경수의 가슴팍을 꾹 누르며 상체를 세웠다. 비좁았던 거리가 도로 멀어졌다. 당장에 덮친 건 순전히 퇴로를 위함이었는지,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킨 백현은 여유로이 침대 밖으로 벗어났다. 씻으려는 듯 욕실로 향하는 그를 구경하며 금세 새빨개진 귀 끝을 만지작거리던 경수가 제자리에 옹그려 앉았다.

“… 항상 필요한데….”

아주 조그마한 혼잣말이었다. 근일 백현이 명백하게 선을 그은 후 외따로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따라 고독감에 앓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부는 바빴고 그때마다 저를 보살펴주었던 백현도 요즈음 본가의 부름을 자주 받고 있었다. 제가 상심할 성싶어 백현은 항상 숨기거나 부정했으나 알고 있었다. 본가에서 부르면 팔 할은 그의 선 때문이라는 것을. 하여 아무도 없이 널따란 집에 홀로 덩그러니 쪼그려 앉아 불안해질 때면, 손목에 남은 백현의 잔향을 맡고 안심했다. 더러는 그의 체취가 잔뜩인 옷장도 파고들었다. 늘 새뜻하니 푸른빛의 숲 내음을 맡고 있자면 가슴 속 요동이 마법처럼 멎었다.

“…… 난 항상 형이 필요하단 말이야…….”

가지런히 모은 두 무릎 위 걸친 팔뚝으로 미목을 비비며 경수가 남몰래 웅얼거렸다. 오직 자신에게만 울리도록 소심하면서도 처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하거늘 경수의 까만 머리통 위로 따뜻한 손이 대답처럼 내려앉았다.

“알았으니까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

“…….”

“페로몬 조절하는 법 알려줄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빼꼼 든 경수가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댔다. 당황스럽게도, 좀 전 욕실로 들어간 줄만 알았던 백현이 제 앞에 서 있었다. 더구나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일상적인 음색까지. 오도카니 얼어있던 경수가 얼떨결에나마 느지막이 끄덕였다. 답언을 들은 그제야 백현은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욕실을 향해 걸음했다.

 

 

쏟아지는 세찬 물줄기를 멀거니 서서 맞고만 있던 백현이 불현듯 팔을 뻗어 샤워기의 콕을 닫았다. 억수같이 쇄도하던 물이 뚝 그쳤다. 함빡 젖은 황금빛 머릿결로부터 트인 물길이 미끈한 목선을 지나 다부진 상체를 훑어 내렸다.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 안에서 백현은 잿빛 바닥 타일만 굽어보고 있었다. 곧은 속눈썹을 타고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바로 눈앞에서 동그랗게 웅크린 수적이 곤두박질쳤다. 마치 훌쩍 떠나듯 순식간에 멀어지며.

‘…… 난 항상 형이 필요하단 말이야…….’

몇 번이고 짓씹은 입술을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사려물었다. 널따란 흉곽이 크게 부풀도록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잠시 멈추고, 삭히듯 천천히 내뱉었다. 한 차례 호흡을 고른 후에야 젖은 머리를 쓸어넘긴 백현이 홀연 몸을 틀었다. 줄곧 한곳에 머물러있던 그의 맨발이 물바닥을 밟았다. 찰박이는 소리가 밀폐된 욕실을 가만가만 울렸다. 희고 보송한 수건을 끌어내어 흥건한 만면을 닦아내고 보니 붉은 혈흔이 묻어났다. 이제금 셀 수 없이 터진 입술에서 새로이 내밴 것이었다. 시허연 천에 붉은 핏자국을 내려다보며 백현은 문득 생각했다.

아, 또 무르게 굴어버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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