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roXXer : not just brothers

[백도] broXXer - 8

특별편인 페로몬 과외 에피소드는 추후 제작될 소장본에서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별편은 포스타입에 따로 공개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broXXer: not just brothers

 

 

높은 빌딩 위로 말그스름한 야공이 광활했다. 어지러이 방황하는 난운 한 점 보이지 않기에 뭇별들도 수줍게 피어나 반짝이는 날, 개중 몇 찬란만을 벗 삼은 백월 또한 휘영청한 한야였다. 여느 때처럼 단지 내 지하 2층 주차장 한편으로 차를 세운 백현이 빈 조수석에서 검은 코트를 챙기고 운전석을 나왔다. 너른 오른쪽 어깨를 옷걸이 삼아 외투를 걸어두고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쾌적한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차창 너머로 보았었던 검은 천장의 목책 아래, 갈고리처럼 대롱 걸린 은백색 윤곽은 어느덧 하현이었다. 발현한 경수를 눕혀두고 제집 베란다에서 보았던 밤하늘 속 월상은 상현에 가까웠었으니, 지금으로부터 대략 이 주는 지난 셈이었다. 그간 아침마다 차로 데려다주며 경수에게 페로몬을 묻혀 두었다. 살을 비벼야 하기에 낯간지러운 짓이었지만 가르쳐줘도 페로몬을 조율할 줄 모르니, 백방을 두루 살펴도 가장 탁월한 수는 그뿐이었다. 거리를 둔다 해서 경수의 안위마저 멀리할 필요까진 없었다. 머리 아프게 언행 하나하나 정교하게 계산할 것도. 답은 간단했다. 그저 가족 같은 이웃. 딱 거기까지만 지키면 그만이었다. 하거늘, 경수는 쉬이 제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제가 멋대로 선을 그은 만큼 멋대로 선을 넘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백현이 벽에 기대어 매시근한 눈길로 층 표시기를 바라보았다. B2, B1… 지상층을 기점으로 숫자가 올라갔다. 마치 나이를 먹듯 차근차근, 쌓인 층수를 디디고 올랐다. 목표는 24층. 승강기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층이자 보편적으로도 퍽 고층이었다. 그곳에 거주하며 무수한 것을 목도했다. 높이 올라갈수록 응당 시야의 범주가 넓어지듯, 세월이 쌓일수록 혜안도 뜨이는 법이었다. 키를 훌쩍 뛰어넘는 나무나 건물처럼 거대했던 것들은 사소한 미물로 보이고, 자그마한 개체보단 총체적인 흐름이 내다보였다. 그렇게 멀찍이서 회색빛 시가지를 지켜보자면 큰 도로를 틀 삼아 건물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있었다. 공공의 안전을 위하여 금지된 것처럼, 질서정연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사슬로 꽁꽁 묶인 목책에서 제게 주어진 것들을 마뜩이 책임지고 가꿔야 했다. 아무리 소담스러운 유혹이 환심을 꾀어낸다 한들 짊어진 몫을 함부로 내려놓아선 안 되었다. 여태껏 제가 안은 것 중 가장 무거웠던 건 18년 전 포대기로 싸인 아이의 무게였다. 지금 다시 안는다고 해도, 모름지기 가장 무거우리라. 내가 그 아이의 현실까지 기껍게 짊어지겠노라 다짐했으니.

띵- 새된 기계음이 들리고 24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떼어낸 백현이 느긋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굳이 앞을 보지 않아도 두 다리는 어련히 자택 현관문을 찾아갔다. 그때 슬랙스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짤막한 진동이 울렸다. 별생각 없이 꺼내든 핸드폰의 홀드를 풀고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문자 화면에 뜬 번호의 숫자 배열이 생소했다. 낯선 이에게서 날아온 전보 또한 생경했다. [ 안녕하세요 백현 씨 내일 선보기로 한 … ] 정체 모를 상대는 명백히 제 이름을 거론했으나 제 딴에는 모르는 내용이었다. 변백현이랑 내일 선보기로 약속한 건 장본인이 아니라 장본인의 모부겠지. 읽다 말고 다시 화면을 끈 백현이 빠른 손놀림으로 도어록을 풀었다.

딱딱한 구두를 벗고 끝까지 죈 넥타이를 끄르며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어깨에 걸친 코트와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의류 관리기에 걸어두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세 개째 해금한 차였다. 불현듯 묘한 낌새가 느껴졌다. 네 번째 단추를 만지던 백현이 손을 멈추고 숨죽였다. 가만 귀를 기울이자 사부작사부작 미세한 기척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상을 느낀 그가 옷방을 나와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확고해졌다. 누군가 있었다. 범인은 아무래도 뻔하지만. 빠르게 침실 앞으로 당도한 백현이 닫혀 있는 문을 벌컥 열었다. 킹사이즈 침대 위, 눈에 익은 아담한 체구가 보였다. 그는 백현의 체취가 풍기는 이불과 시트지에 대고 신난 강아지인 양 온몸을 비비고 있었다. 생김새도 꼭 말티즈 같이 생겨서는, 치켜세운 엉덩이에 조만간 하얀 꼬리라도 퐁 돋아날 것 같았다. 문턱에 기대어 팔짱까지 끼고 구경하던 백현이 느지막하게 말문을 뗐다.

“여기 네 집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제야 정신없도록 뒹굴뒹굴 굴러다니던 경수가 허리를 퍼뜩 세워 문간에 선 백현을 바라보았다. 평시 정갈하던 까만 머릿결이 방금의 몸부림과 정전기에 사방팔방으로 부스스 뻗쳐 있었다. 발그레한 낯빛에다 가벼이 할딱대는 모습이 바둥거리느라 힘깨나 쓴 모양이었다. 그 밑으로는 백현이 자주 입는 넉넉한 후드티와 무릎 위까지 오는 트레이닝 반바지까지. 실컷 흐트러진 행색의 경수가 배시시 웃으며 화답했다.

“형 침대가 너무 좋아서 못 가겠어요.”

“똑같은 거 하나 사줘?”

“형 페로몬이랑 비누 향까지 완전 똑같은 거로.”

“작작 까불고 가라.”

“외로워… 형이랑 있을래…….”

진한 눈썹 끝을 축 늘어뜨린 경수의 도안이 울상으로 촉촉이 젖어 들었다. 큼직한 눈망울로는 처연한 빛을 자아내며 두 팔로는 담숙한 이불을 한아름 끌어안으니, 누군들 안아주고 싶도록 퍽 애처로운 자태였다. 주춤한 백현이 얄따란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겉은 예사로워 보이되 그의 기류에 미세한 변주가 일렁였다. 곧장 눈치챈 경수가 움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스렸다. 예로부터 저와 고독감이 역린인 백현이었다. 따라서 그로서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경수가 백현에게로 쪼르르 다가가더니 이번엔 그의 덜미를 덥석 안았다. 한껏 어여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건 덤이었다.

“… 내쫓을 거예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은근히 아양 떠는 경수를 백현은 무뚝뚝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별말도 없었다. 하여 마지못해서라도 허락해주려나 싶던 찰나였다. 시종 과묵하던 백현이 돌연 허리를 숙였다. 느닷없는 행동에 당황도 잠시, 전처럼 너르게 벌어진 어깨 위로 짐짝처럼 둘러메진 경수의 표정에 낭패가 서렸다.

“아 싫어 내려줘!”

“밤이다. 목소리 낮춰.”

“내, 내려줘요…! 형이랑 같이 있기만 할게요…!”

“난 너랑 같이 있을 마음 없거든.”

“아아… 아 정말 얌전히 있을게요, 진짜.”

“…….”

“혼자 있기 싫어요, 형…….”

백현의 하이얀 셔츠를 꾹 움켜쥔 손에 간절함이 더해졌다. 특유의 고즈넉한 음색에도 애달픈 본심의 물기가 서렸다. 혼자 있기 싫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과할 정도로 드넓은 집 한 편 한갓지게 앉아있자면 무릇 온갖 생각이 득달처럼 몰려들었다. 괘념의 주범은 역시 백현이었다. 하잘것없이 녹록한 잡념도 켜켜이 쌓이면 짓눌리기 마련이었다. 홀로 괜히 불안한 감정에 들볶이며 헛된 시간만 죽이기 싫었다. 상황이야 어떻건 예나 지금이나 백현의 담장 안이 가장 안온했다. 하여 절실한 내심을 보이자, 신발장을 일 보 앞에 두고 멈춰 서 고민하던 백현이 결국 느직하게 경수를 내려주었다. 발끝에 지면이 닿아서야 안심한 경수가 백현의 허리를 닁큼 끌어안았다. 그렇게 당해놓고도 품에다 묻은 앳된 얼굴을 보아하니 백현은 부쩍 늘어난 한숨이 절로 샐 것 같았다. 하나 이는 어쩔 수 없었다. 둘 모두 어렸던 유년 시절, 경수는 분리불안증을 앓았고. 그것은 꼭 백현과 멀어졌을 시에만 발병하곤 했으니.

“부모님 오시면 갈게요….”

“…….”

“… 그러니까 내쫒지 말아주세요…….”

애써 어린 마음을 감추지만 여실히 먹먹한 투였다. 그리 애원하니 당최 이길 수도 내칠 수도 없었다. 돌봐주는 심정으로나마 허락할 수밖에. 경수의 동그란 가마 위로 손을 턱 올린 백현이 찰싹 달라붙은 그를 슬쩍 밀어내곤 재개 옷방으로 향했다. 그가 편하게 입을 홈웨어와 잘 마른 수건 두 장을 꺼내왔을 때 경수는 거실 소파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작고 마른 체구라 꼭 모퉁이에 박힌 모양새였다. 후드티 소매 부근에 코를 박고 킁킁대던 경수가 홉뜬 눈으로 백현의 눈치를 살폈다. 뱉은 말마따나 짓수굿한 본새였다. 그를 뒤로하고 욕실로 걸음한 백현이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욕실 바닥을 찰박찰박 두드리는 물방울들의 음이 들려오고, 외따로이 쭈그린 경수는 어득한 수적의 노래에 가만 귀 기울였다. 바닥에 닿은 물줄기의 거친 단말마만이 유일한 소음이라, 감상하고 있자니 마구 깨져나가는 물방울들의 형상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그게 꼭 제 심정 같았다. 멀거니 바닥만 내려다보던 경수가 틈 없이 닫힌 욕실 문으로 시선을 올렸다. 요즈음에는 백현의 널따란 등판을 자주 목도했다. 꼬박 하루에도 몇 번은 보았다. 항시 시야 안에 제가 있어야만 안심하던 백현이었다. 아무리 쌀쌀맞게 내치거나 다정하게 타일러 밀어낸들 그는 형으로서 아주 뒤돌진 못했다. 마주 보고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었다. 하나 이젠 완전히 뒤돌아, 본인의 울타리 안으로도 웬만해선 들이지 않으려는 듯했다. 저를 위해 청렴하게 살아온 백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야 지레 알고 있었다. 또 이해했다. 통념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은 만물에게 거룩할지언정 오로지 사랑만으로 살순 없었다.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은 로맨스가 회자되는 이유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고 사랑은 때로 사람과 삶을 파괴한다. 마치, 백현의 망가진 입술과 오른쪽 팔오금에 남은 상흔처럼. 누누이 절감하고 있었다. 비록 저와 결은 다르되 변백현이 도경수에게 하사하는 사랑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걸. 순결한 애념으로 대하는 그에게 성애를 느끼고 조르는 건 독일 수 있다는 걸.

하지만 형, 형이 내 앞에 있는데 내가 누굴 사랑하겠어.

타박상을 입지도 않은 가슴이 쌉싸름하게 쓰렸다. 아무리 등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명치를 안쪽으로 말아도 통증은 면제받을 수 없었다. 이미 고장 난 관계였다. 상호 입장 따위 고려하지 않고 어린 생각에 제멋대로 성애를 갈구했을 때부터 망그러졌다. 그러한들 되돌아갈 마음도 없었다. 돌아갈 수도 없었지만.

그렇게 애먼 욕실만 하릴없이 응시하며 백현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긴 타념에서 깨어나라는 양, 어디선가 진동음이 울렸다. 반짝 정신을 차린 경수가 발원지를 향해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듯 널브러진 백현의 핸드폰이었다. 빛나는 액정 속엔 열한 자리의 숫자가 환히 떠 있었다. 지잉- 지잉-. 수신을 재촉하듯 진동은 꽤 길게 이어졌다. 머뭇머뭇 망설이던 경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백현의 핸드폰을 쥐었다.

“……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백현 씨.’

처음 접하는 낯선 음성이었다. 정체 모를 발신인은 예상대로 백현을 찾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구별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심 당황한 경수가 자신은 백현이 아니라며 해명하려던 참이었다. 순서를 가로채듯 귓전의 스피커 너머로 뒷말이 이어졌다.

-‘… 문자 드렸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으셔서요. 맞선 같은 거 불편해 하신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저희 만나기로 결정됐으니까….’

“…….”

-‘…… 백현 씨?’

선 자리. 혼자 있는 내리 저를 불안케 만들었던 짐작은 어느 틈엔가 몰래 실현되어 있었다. 일순 언어를 잊은 산홋빛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적막이 응집된 갈색 눈동자가 바닥으로 뚝 곤두박질쳤다. 모든 게 다 빛 한 점 없는 세상의 밑변으로 추락하는 기분. 무형의 낙조류를 타고 천사만감마저 쓸려 내려갔는지, 화는커녕 눈물도 나지 않았다. 텅 빈 환신에 남은 것이라곤, 오직 허망. 어린 나는 아무리 발버둥질 쳐도 이 사랑은 안 되는구나. 내 탓도 아닌 나의 이유가 내 걸림돌이 되어서 안 되는구나. 전부 포기하라며 종용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저를 두둔해주었던 백현도, 그의 집안도, 당장의 발신인도. 세상 어디 제 편 하나 없었다. 미약한 흔들림조차 없이 잠자코 듣기만 하던 경수가 딱딱한 핸드폰을 꽉 움켰다. 마르고 단정한 손잔등에 가느스름한 뼈대가 하얗게 불거졌다.

-‘백현 씨, 많이 바쁘신….’

“그 형 나랑 키스했어요.”

충동으로 뱉은 말을 마침과 동시 전화를 뚝 끊었다. 홧김에 이뤄진 언행이었다. 갑작스러운 발언과 두절된 전화에 놀랐는지 발신인은 다시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도로 잠잠한 핸드폰을 그러쥔 경수가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반듯한 이마를 기댔다. 여직 물소리가 저물지 않은 거실 한 켠에서 한참이나 침묵으로 시간만 죽이고 있자니, 함부로 게워낸 말과는 다르게 제 처지는 고적하기가 그지없었다. 여느 때처럼 꾸역꾸역 참아내던 경수가 저린 다리를 끌고 재개 백현의 침실을 열었다. 안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하얀 침대로 풀썩 엎어지자 앙금처럼 가라앉았던 백현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싱그러운 나무와 향기로운 비누 냄새. 그의 페로몬과 살 내음이었다. 그대로 눈을 감은 경수가 몽톡한 손끝으로 깨끗한 이불을 어루만졌다. 코에 익은 백현의 흔적과 빳빳한 섬유가 바스락거리며 뇌리를 살살 일깨웠다. 잠 못 이루는 저를 위해 오래된 동화책을 꺼내와 조곤조곤 읊어주었던, 가끔은 그 좋은 목소리로 나직이 자장가를 불러주었던, 까무룩 잠들 즈음 까슬한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주었던 백현의 기억이 솝떠올랐다. 해서 자꾸만 이곳에 돌아와 눕게 됐다. 그와 함께 누웠던 수많은 시간도 실타래처럼 한 데 짜여있었기에.

 

말끔하게 씻은 후 트레이닝복 하의만 덜렁 입은 백현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비비며 욕실을 나섰다. 뽀얀 수증기로 다습한 공간을 열고 나오니 분명 닫아두었던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틈새를 통해 내부로 고개를 기울인 백현이 수건질을 멈췄다. 시트지에 코까지 박은 자세가 썩 불편해 보이는 데도 죽은 듯 조용히 엎드린 경수가 보였다. 언제 어디다 내던져두었는지 깜빡 망각한 제 핸드폰도 경수의 손에 들려있었다. 잠시간 멈춰 서 있던 백현이 침실 안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엎더진 경수의 배 아래로 팔을 쓱 집어넣은 그가 힘주어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너풀너풀 딸려오는 경수를 옆구리에 단단히 끼운 백현이 어슬렁어슬렁 거실로 나왔다.

“내 침대에 돈 숨겼냐.”

“저기서 형 냄새가 제일 많이 나요.”

“계속 까불면 돌려보낸다.”

“이제 정말 가만히 있을게요.”

거실 불을 끈 백현이 어둠을 가로질러 푹신한 소파 위로 경수를 옮겨놓았다. 기운 하나 없이 축 늘어져 있던 몸이 풀썩 내려앉았다. 졸지에 모로 드러눕게 된 경수가 주섬주섬 웅크려 앉았다. 그리곤 큰 눈을 데굴 굴려 백현을 힐끗 살폈다. 다소 멀찍이 떨어져 앉아 티브이를 켠 백현은 리모컨으로 느긋하게 영화를 고르고 있었다. 엷게 저며낸 밤그늘 한 꺼풀로 싸인 옆얼굴이 보였다. 무의미한 빛이 잔별처럼 영근 눈동자, 높은 콧대의 수려한 능선을 타고 유유히 흐르는 갖가지 색채. 툭 불거진 빗장뼈에도, 훤히 드러난 가슴팍과 잔 근육에도 일일이 고여 공연하게 남실거리는 오색의 찬란까지.

“왜.”

시종 티브이 화면만 내다보던 백현이 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를 바라보지 않되 명백히 저를 겨눈 질문이었다. 시선에 용건은 없었다. 그저 무용한 응시였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바라만 봤을 뿐이었다. 한데도 굳이 묻는 백현에게 불현듯 설움이 울컥 북받쳤다. 이젠 본인을 쳐다보지도 말라는 듯해서, 감히 바라지도 말라는 듯해서. 애심이 울렁였다. 하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

“… 형 감기 걸릴까 봐요.”

“신경 쓰지 말고 영화나 골라.”

무용히 달싹이던 입술은 에둘러 변명해도, 속심은 따로 말했다. 아니 실은, 성인이 되면 제게 마음을 열어줄까. 다 크면 저와 똑같은 결로 사랑해줄까. 언젠가 백현이 읽어주었던 동화 같은 상상으로 지내왔거늘.

“… 형.”

“또 뭐.”

“내일 선 보러 가지 마.”

시간처럼 속절없이 멀어지기만 하는 백현을 붙잡고 싶어서.

티브이 빛만 자적하게 헤엄치는 캄캄한 거실. 정면의 화면으로부터 번진 각색의 빛살이 표정 없는 두 얼굴 위에 번져 유영했다. 그 가운데 묵묵히 고개를 돌린 백현이 경수와 눈을 맞췄다. 한마디 오가는 언질 따위 없더라도 그가 무엇을 말하고픈 것인지 지레 선감할 수 있었다. 날카롭지도 무디지도 않은 직시를 지그시 견뎌내던 경수가 입술을 뗐다.

“…… 형 씻을 때 전화 왔었어요.”

“…….”

“내일 형 만난다는 사람한테.”

담백한 진언이었다. 그제야 백현의 메마른 눈길이 다시금 티브이로 돌아갔다. 연이어 엄지로 리모컨 버튼을 몇 번 달칵달칵 누르는 행태가 마치 아무 말도 섞지 않았다는 양 의연했다. 일자로 곧게 다물린 입가가 보였다. 가지 말라는 말에 대해 마뜩한 회답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백현은 회피했다. 그 모습을 오도카니 지켜보던 경수가 옹그린 자세를 풀고 무릎걸음으로 살금 다가갔다. 이번엔 피하지 못하도록 그의 허벅다리 위로 살포시 앉자, 티브이가 위치한 자리에 먼눈팔고 있던 백현이 눈동자만 치떠 경수를 올려다본다. 가일층 가까워진 거리와 창밖 달로부터 밀려온 야음에 튜베로즈의 페로몬이 곱절 농후하게 풍겨왔다. 진한 향을 맡은 백현이 무방비한 손끝을 움찔 떨었다. 아차 싶은 심정이 스쳤다. 이 아담한 몸에 아로새겨진 페로몬과 밤의 은밀한 상관관계. 어둠을 먹고 달빛에 취한만큼 생장하는 향, 월하향(月下香)은 밤의 꽃임을, 간과하고 있었으니.

“가지 마.”

지척에서 살근 속삭이는 나지막한 음성이 귀 고막마저 간지럽혔다. 어느 틈엔가 흥분한 말초신경이 바짝 곤두선 느낌. 막을 만한 겨를 따위 없었다. 그냥 참아내기도 버거운 꽃내음이 배로 난만하게 흐드러져 속절없이 침투했다. 첫 히트사이클을 맞이했던 그날과 대등하면서도 더 고혹적인 페로몬이었다. 평온하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말랐던 입 안엔 군침이 돌았다. 그대로 홀려버린 정신이 이성과 함께 자디잔 으스러짐으로 소실되는 것이 선연했다. 하여 입 맞출 듯 기울어오는 경수의 입술도 고스란히 받아줄 뻔한 찰나. 한 겹의 금기를 깨려는 두 사람을 말리는 것처럼, 백현의 핸드폰에서 또 한번 진동이 울렸다. 저장하지 않은 발신자의 열한 자리 숫자는 좀 전 경수가 받았던 번호였다. 번뜩 이지의 편린이라도 되찾은 백현이 곧장 핸드폰으로 팔을 내뻗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다소 억눌린 음색이 성대를 긁었다. 흡사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백현의 엄정한 눈초리가 목전의 경수를 빤히 노렸다. 보란 듯 전화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수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외려 비좁은 간격 속에서 각자의 초점은 서로를 악문 채 한 치도 놓아주지 않았다. 하나 시선의 온도는 확연히 달랐다. 시리도록 차디찬 백현과 뜨겁다 못해 처연히 녹아버린 경수의 눈결. 채 섞이지 못한 감정의 증명이 한 데 질펀히 엉켰다.

-‘아, 백현 씨 맞으시죠? 아까 다른 분이 받으신 것 같아서…. 그런데 아까 전화 받으신 분께서…….’

비켜.

스피커 너머의 상대에겐 들리지 않도록 입만 벙끗한 백현이 좌측으로 턱짓했다. 떨어지라는 경고였다. 그러한들 경수는 꼼짝하지 않았다. 백현의 냉정한 입술을 읽었으면서도, 해서 상처 입었어도, 전처럼 당찬 기색은 못 꾸미되 기껏 덤덤한 척했다. 그 형색이 언뜻 예사로워 보이나 백현에겐 여실히 보였다. 아이는 슬퍼하고 있었다. 밀어낼 때마다 잘 벼린 서슬로 심장을 얇게 포 뜨는 것만 같았던 통증이 예외 없이 깃들었다. 더는 썰어낼 건덕지조차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여겼던 가슴 안전이 또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진즉 헐고 터져버린 입술을 제풀에 사리물려던 백현이 갸름한 턱으로 힘주어 삭혔다. 이때마다 애꿎은 입술만 거듭 괴롭히는 것도 이제금 버릇이었다. 내색하지 말아야 했다. 참고 다시 한번 명백히 선을 그어야 했다. 당장은 고통스러울지언정 경수를 위한 일이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알고 있지만……. 눈앞의 경수가 눈물 없이 울고 있었다. 신음 한 점 없이 오열하고 있었다. 아득한 밤하늘, 사라진 별들은 모두 그 눈 속에 녹아 울고 있다 해도 믿을 법한 빛을 띤 채로.

-‘…… 백현 씨랑, 키스… 했다고….’

스르르. 균형을 무너뜨린 경수가 백현에게로 입을 맞췄다. 두 이형의 앵순이 여린 살 끝부터 말캉하게 맞물렸다. 살그머니 이를 세운 경수가 얇은 입술을 살살 물었다. 전보다 덧난 상처를 어르듯 혀끝으로 핥고 자신의 타액을 연고처럼 바르자 백현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이 소파 위로 툭 떨어졌다. 반동에 튀어 오른 기기가 딱딱한 대리석 바닥과 부닥쳐 찰파닥 소음을 내도 살펴보는 이는 없었다. 채 다물리지 않은 입술을 열고 들어오는 혀에 백현이 경수의 뒷자락을 꽉 그러쥐었다. 유독 곱상한 손잔등의 관절이 창백하게 질리고 가는 뼈대와 푸르른 핏줄이 나뭇가지처럼 불거졌다. 그가 무엇을 참는지도 모르고, 기어이 스미어든 입 안의 살덩어리끼리 물렁하게 닿았다. 각기 민감한 혀가 얽히는 감촉에 목구멍부터 일어난 전율이 화염처럼 확 번졌다. 폭풍 속 불길마냥 조밀하게 얽힌 세포를 타고 속히 퍼진 전류에 발끝까지 찌릿했다. 분명 두 번째 키스였으나 전보다 더한 쾌락이 낯설었다. 혀끝을 자리자리하게 찌르는 간지러움에 못 이긴 경수가 고개를 내뺐다. 얕은 섞임에도 쉬이 달아버린 두 입술이 촉촉한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그러나 도망은 찰나에 불과했다. 감았던 눈을 사륵 뜬 경수는 보았다. 백현의 망막에 맺혀, 시퍼렇게 반뜩이는 안광을.

금욕하기 위해 옷자락을 붙든 손으로 되레 경수의 곧은 뒷덜미를 받친 백현이 다시금 입 맞췄다. 떨어졌던 입술이 도로 성급하게 되물렸다. 입술과 혀끝만 할짝댄 방금과는 다르게 백현이 사하는 키스는 다분히 깊고 거칠었다. 흡사 입 안을 넘어, 보다 더욱 내밀한 곳까지 온통 탐할 기세였다. 그로 인해 밀려나자 남은 팔로 경수의 허리를 너끈하게 거머안은 백현이 부지불식간 자세를 틀었다. 억센 힘의 유속에 이끌린 경수가 소파 위로 풀썩 눕혀졌다. 이로써 물러날 여지 따위 없었다. 두 상체가 틈도 없이 밀착하고, 욕정의 고삐를 놓아버린 백현은 가히 경수를 집어삼킬 듯 파고들었다. 입 속을 가득 채운 살덩이의 까끌한 돌기가 여린 속살을 유연하고도 탐욕스럽게 훑었다. 살집 없이 마른 뺨에 동근 코끝이 눌릴 만큼 스며들어 숨이 턱턱 막혔다. 안을 빠듯하게 메꾼 백현의 혀는 저를 황홀로 꾀어냈으나, 퍽 가혹하도록 농밀한 입 맞춤은 선뜩하기도 했다. 마치 사나운 금수에게 잡아먹히는 처지 같았다. 예민한 입천장을 건드릴 땐 아찔한 환락에 절로 움씰움씰 옴츠리며 신음을 흐느끼되, 이건 무서웠다. 주먹을 그러쥔 경수가 다급히 백현의 다부진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가로막힌 호흡이 길어지니 핑 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한데도 물러나긴커녕 백현은 경수의 후드티 안에 감춰진 보드라운 속살로 검은손을 뻗었다. 마른 옆구리에 닿아오는 손끝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토록 견고하던 이성을 완전히 놓아버린 태세였다. 결국 두 눈을 힘껏 지르감은 경수가 조금 더 힘있는 악력으로 백현의 상박을 밀쳐냈다.

“하아- 하…, 흐…….”

비로소 입술을 떼어낸 백현이 제 밑에 깔려 할딱이는 경수와 마주했다. 그 또한 상기된 기색에다 탄탄한 가슴을 들썩이며 불규칙한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한껏 뜨겁게 흥분한 몸과 자꾸만 서로를 향해 갸울어지는 마음, 맞댄 코끝 사이로 불온하게 오가는 숨결까지. 위태로운 둘의 주변으로는 어느 틈엔가 공기를 가득 전염시킨 나무와 꽃의 페로몬이 낭자했다. 서로를 갈망하고 갈구했던 입 맞춤처럼, 이미 엮어버린 혀처럼. 아울러 자물린 욕망의 잔흔이 생생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명백한 증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열망했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나,

“…… 가.”

끝내 사랑에 닿지 못한 어린 꽃의 속잎은, 채 흐드러지기도 전에 덧없이 낙화했다.

“그리고 다시는 멋대로 찾아오지 마.”

아주 나직하게 잠긴 음성이 또박또박 뇌까리듯 을렀다. 답지 않게 격앙된 백현의 눈초리가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연방 흔들렸다. 얇은 눈꺼풀도 언뜻 가냘프게 떨리는 것 같았다. 아, 이렇게 직면하자니 보였다. 등이 아닌 눈을 보자 백현은 미묘하게도 지친 구석이 은연했다. 도대체 왜? 차마 토해내지 못한 질문이 혀 위에 얹혀 나오질 않았다. 왜 그런 얼굴인지, 다치는 쪽은 저인데 왜 그리 쇠하고 아파 보이는지. 많은 것을 묻고 싶었다. 이다지도 청푸른 백단의 향을 잔뜩 흘렸으면서, 저를 이토록 향긋하게 꽃피워놨으면서, 입 맞췄으면서. 어째서 또다시 잔인한 건지도. 제 위에 백현을 허망히 올려다보던 경수가 홀연 서글픈 눈망울로 실소를 터뜨렸다. 발긋한 입술로부터 소성을 빙자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수 없이 다친 가슴은 이제 해질 대로 해져 너덜거리기까지 하는데, 여전히 좋다고 두근대는 제 꼴이 우스웠다. 스스로 자조하는 경수의 휘어진 눈 끝으로 아슬아슬하게 여물었던 유체가 결국 흘러내렸다. 투명하게 트인 눈물길은, 이번에도 닦아주는 이 하나 없이 외롭게 트였다.

“… 형, 지금 나랑 혀 섞었어요.”

“…….”

“원했잖아 형도.”

축축하게 젖은 갈색빛 홍채가 백현의 두 눈을 갈마본다. 답을 구하고 속을 확인하려는 눈짓이었다. 퍽 애달픈 무언의 요구에도 백현은 고요히 불응했다. 설핏 단초를 주었던 표정은 평소대로 갈무리하여 없었다. 그새 추스르고 닫아버린 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는데, 차라리 떼어내 버리고 싶을 만큼 심장이 지끈거리는데. 백현의 맨 어깨만 간절히 부여잡고 있던 경수가 천천히 눈길을 내리깔았다. 제가 숱하게 안기고, 안아줬던 가슴팍은 여전히 널따랗고 단단했다. 그 한가운데 뿌리 내리고 있을 붉은 씨앗의 태동을 느껴보고 싶었다. 저와 정말 다르게 뛰는지 체감하고 싶었다. 스르르 손을 내린 경수가 백현의 홧홧한 살갗을 느직이 훑어내렸다. 찬찬히, 찬찬히. 어렴풋한 고동을 확인하기 직전이었다. 막 심부에 도달한 차 백현의 곱상한 옥수가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챘다.

“어, 맞아.”

“…….”

“내가 널 원해서.”

지레 예견했으나 역설적이게도 미처 예상치는 못한 고백이었다. 이역 묵언으로 일관할 줄 알았으니까. 내심 당황한 경수가 재개 말간 눈동자를 홉떠 백현을 쳐다봤다. 그는 좀 전과 매한가지로 무덤덤히 저를 직관하고 있었다. 으레 일상적인 어투에다, 특별한 미동 없이 그저 예사로운 얼굴. 꼭 항상 원해왔다는 듯이.

“골백번 안 된다 되뇌도 지금 당장 내 밑에 깔린 널 보면 어떻게 해버리고 싶을 만큼 원해서, 근데 지금의 너는 감당 못 할 걸 알아서,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 알면 네가 겁먹고 도망칠 것 같아서…!”

목하의 경수를 직면한 채 여태껏 감금해놨던 본심과 감정을 선연히 드러낸 백현이 말문을 닫으며 숨을 골랐다. 쉴 틈 없이 쏟아낸 진심에 놀란 듯 경수는 커다란 눈으로 빳빳하게 얼어있었다. 그런 그를 가만 주시하던 백현이 팔을 뻗었다. 마른 지첨에 윤기 밴 순흑빛 머리카락이 닿았다. 결 좋은 흑발이 늘씬한 손가락 사이사이 잔잔하게 은류했다.

“…… 경수야.”

“…….”

“나는 네 생각만큼 그리 바르고 착한 형이 아니야.”

부드럽게 흐르던 손길이 말랑한 귓불을 어루만지고. 이내 곧은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사분사분하니 자상하되 꼭 손으로 핥듯이 집요하면서도 끈적한 손짓이었다. 살결을 긋는 손끝의 궤적을 따라 촉각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았다. 분명 지나간 자리임에도 여직 만져지는 듯한 여운이 남아 귓불과 목, 쇄골 언저리가 짜릿했다. 그것은 백현이 품고 있는 성애의 감각이었다. 일각에 불과하다만, 그에게 도사린 음욕을 여실히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

“…….”

“너 지금 좀 많이 위험하거든.”

 

 

'broXXer : not just br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도] broXXer - 10  (28) 2020.05.03
[백도] broXXer - 9  (0) 2020.04.27
[백도] broXXer - 7  (0) 2020.04.27
[백도] broXXer - 6  (1) 2020.04.27
[백도] broXXer - 5  (0) 2020.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