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푸른 한야에 싸늘히 이지러진 손톱달마저 노랗게 무르익을 만큼 느지막한 새벽. 으레 푸근한 침구에 누워 곤히 몽중을 기행하고 있을 시각이었다. 옅은 빛 은은하게 자아내는 무드등으로 인하여 어슴푸레한 방 안, 밭은 호흡음이 연방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아, 하아-…. 줄곧 넘쳐흐르는 홧홧한 숨결에 가느다란 입술이 바싹 말랐다. 다부진 외팔로 경수의 어깨를 가뿐히 거머안은 채 잠든 백현이 돌연 곱상한 미간을 찌푸렸다. 예민하게 치켜선 아치형 눈썹 끝 관자놀이로 말간 진땀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마치 악몽을 꾸듯 끓어오른 열에 시달리는 그의 근방으로 급기야 백단향의 산뜻한 페로몬마저 실낱같은 가지를 파르라니 뻗기 시작했다. 불편할 만큼 크고 박차게 뛰는 심장은 그만 깨어나라는 듯 종용했다. 쿵쿵. 점차 고조되는 이상 징후에 눈살을 찡그린 찰나, 불현듯 찌르르 울리는 아랫배를 움찔 떤 그가 두 눈을 번뜩 떴다. 작디작은 반딧불의 생동처럼 미약한 불빛, 으스름한 천장이 보였다. 발긋발긋이 상기된 낯빛에 또렷한 시선으로 멀거니 굳어있던 백현이 일순 멈춰둔 숨을 탄토했다.
“…… 하, 윽….”
다시금 인상을 콱 구긴 그가 빈손을 들어 뜨끈한 눈가를 짚었다. 잔뜩 억누른 신음이 절로 내뱄다. 어느샌가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삭신 군데군데 아찔한 감각이 퍼졌다. 무심코 흘려버린 소리에 고개를 돌린 백현이 곧장 품 안의 경수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심수를 취하는 중인지 지척의 사정도 모른 채 새근거리고 있었다. 다만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도 평소보다 발그스레한 뺨이 눈에 띄었다. 은연중 개방된 자신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은 낌새였다. 그 단화한 도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백현이 경수를 감싼 팔뚝에 힘을 주어 깊이 끌어안았다. 두 몸끼리 스르르 밀착하며 백현의 미끈한 목으로 도톰한 입술이 와닿았다. 연약한 피부로 말캉하게 흐무러지는 촉감과 따뜻한 숨열이 간지러웠다. 한데, 자는 동안 러트사이클을 맞이한 제 몸은 그마저 찌르르한 전율로 받아들였다. 겨우 포옹만으로도 자의와는 관계없이 하복부가 딴딴해졌다. 동그랗게 모은 입술로 긴 숨을 후- 뱉어낸 백현이 손이라도 있는 힘껏 그러쥐었다. 뼈 마디마디 희도록 꽉 앙군 수중엔 제 품속의 아이를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일념만이 담겨있었다. 여타의 잡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가없이 귀중하고도 애틋한 존재를 가까스로 되찾은 사람처럼 경수를 끌어안고 버틸 뿐이었다. 그렇게 건드리지 못하고 흥분한 체내를 추스르던 중이었다. 어득한 수중에서도 바뀐 자세를 감지한 양 경수가 보스락대며 뒤척였다. 다분히 잠에 도취해 몽롱한 동작이었다. 분명 수마에 눈이 가려졌음에도 경수는 누구의 품속인지 아는 듯 제 옷깃을 힘없이 쥐었다가 놓았다. 영락없이 갓난아기가 손가락을 죄암대는 꼴이었다. 그게 썩 귀여워, 힘겨운 와중에도 숨죽인 채 웃은 참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경수의 목직한 다리 한 짝이 예민한 아랫도리를 건드렸다.
갑작스러운 자극으로 인하여 크게 흠칫한 백현의 얼굴에서 즉각 웃음기가 사위었다. 자신의 배꼽 아래 바짝 발기한 음욕이, 꼿꼿하게 불거진 그것이 얄팍한 섬유 한 겹 덧대고 경수의 마른 다리와 진득하게 문질러졌다. 딱딱한 것에 걸려 더는 올라가지 않는 하지가 못마땅한지 시뜻한 칭얼거림이 ‘끙-…’하고 아주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뒷덜미의 모골이 소름으로 바짝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다급하게 팔을 내린 백현이 경수의 매끈한 허벅다리를 쥐고 막았다. 완고한 악력 덕택에 요망한 잠투정은 얼른 그쳤다만, 그러한들 지레 고양되어있던 육신이 사그라들진 않았다. 자느라 먼눈인 경수가 뭣도 모르고 애무한 그대로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이제금 정신력으로 안추를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다. 단잠은 죄 그르쳤구나. 선뜻 험난한 앞일을 예감하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백현이 경수의 이마 위로 얄따란 입술을 파묻었다.
“경수야… 좀 살려줘라.”
이러다 네 형 죽는다. 하나 부탁을 속삭여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애당초 세상 모르도록 잠든 사람에게 뭘 바랄까. 더구나 대상은 경수였다. 페로몬 조절에 관한 속성 과외 이후 간신히 절제하는 기미는 맡아지되 여태 서툴렀다. 단전에서부터 우러나온 한숨을 푹 쉰 백현이 저를 내리누르는 경수의 뽀얀 다리를 거두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이에게 내어준 팔뚝을 지지대 삼아 바로 위에서 가만 내려다보자니 본디 말간 외모가 더욱 돋보였다. 가지런히 감긴 큰 눈과 나붓이 내려앉은 곧고도 긴 속눈썹, 살포시 벌어진 입술의 탐스러운 복숭앗빛만큼이나 불그스름한 뺨. 곱단한 이목구비를 찬찬히 훑던 백현의 두 눈에 별안간 이채가 서렸다. 완만한 선으로 부드럽던 눈모가 첨예하게 벼려졌다. 전 같았더라면 곤히 잠든 얼굴에 요람 속 갓난아기를 떠올렸을 테지만 이젠 아니었다. 제풀에 위험한 충동이 더럭 솟구쳤다. 온갖 음탕한 살빛 상상이 머릿속을 된통 뒹굴었다. 느직이 일어나 등허리를 곧추세운 백현이 느슨하게 깔뜬 눈으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막 고개를 든 백현의 홍조 띤 낯은 끓어오른 신열과 투명한 땀에 촉촉이 젖어있었다. 반면 경수는 색색 고른 숨만 홀곤히 내쉴 뿐이었다. 더는 그와 같은 공간에 있기 버거웠다. 웬만해선 잠든 아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으나, 단아한 생김새의 튜베로즈는 밤이 되면 곱절 고혹적인 향기를 풍겨오니. 이대로 있다간 기어코 덜 여문 다리를 벌려낼 것 같았다. 제가 모두 삭히고 돌아올 때까지 잘 자고 있길 바라며, 경수의 반질반질한 뺨을 손바닥으로 누근히 쓸어준 그가 이내 침실을 나섰다.
곧장 부엌으로 걸음한 백현은 식탁 위 작은 등 하나 켜둔 채 찬장을 뒤졌다. 보름 새 반이나 줄은 억제제 통 옆, 밀봉된 3cc 주사기와 손가락 반 마디만 한 약물통이 한 줌에 잡혔다. 간편하게 알약으로도 진정할 수 있었지만 주사 만큼 약효가 속히 돌진 못했다. 홀로 깨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경수가 자신의 빈자리를 느끼고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조치한 뒤 돌아가야 했다. 비닐 속 주사기를 꺼내어 바늘 마개를 제거한 백현이 약물통의 무른 고무 뚜껑으로 날카로운 침선을 박아넣었다. 주사기 몸체인 겉통을 그러쥐어 엄지로 밀대를 올리자 투명한 약액이 눈금을 채웠다. 차내 조수석 글로브박스 안에 준비해 놓은 건 이런 번거로움을 미리 생략한 것들이었다. 위급할 때 재깍 쓸 수 있도록. 능숙한 손놀림으로 주사기에서 공기를 솎아낸 백현이 허연 긴소매를 올려붙였다. 손목까지 덮고 있던 옷이 걷히니, 진즉 주삿바늘로 낭자한 왼 팔뚝이 드러났다. 굵은 핏줄이 곧잘 두드러지는 팔오금 쪽에만 일곱, 팔 중앙에도 두 개의 홍점이 맺혀있었다. 오른팔도 빼곡한 처지는 매한가지였다. 식탁에 걸터앉은 백현이 자신의 팔뚝을 이리저리 살피며 궁리했다. 이번엔 어디다 쑤셔야 하나. 마른 손등에 포진된 정맥망도 있었다만, 더럽게 아프기도 하고. 무엇보다 경수에게 들키는 건 사양이었다. 분명 속상해할 것이 뻔했다. 하여 고심하던 그가 택한 곳은 왼팔 오금에서 한 뼘 아래였다. 구태여 압박하지 않아도 어련히 솟아오른 정맥에다 견리한 주삿바늘을 꽂은 백현이 고개를 젖히고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한껏 과민해진 터라 혈관을 통해 스미는 약액의 흐름마저 느껴졌다. 이제 앞으로 십오 분. 그 이후면 난데없이 발병한 러트사이클도 가라앉으리라.
평생 질서정연하게 오갔던 발정기가 돌연 변칙적으로 꼬인 이유는 경수에게 있었다. 갓 발현한 탓에 페로몬 조절이 어려워 약의 도움을 받는대도 우성의 향은 완벽하게 통제할 순 없었다. 그런 경수를 줄창 곁에 두고 못다 한 시간을 채우려는 양 붙어있으니 제 발정 주기마저 꼬이고 말았다. 본디 제날짜에 오지 않고 불발한 정염은 그야말로 시야의 저변에 은닉한 시한탄이나 다름없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 형-….”
와중이었다. 홀연히 침실 문을 연 경수가 노곤한 저음으로 백현을 불렀다. 뻗친 머리에 나른한 손짓으로 덜 뜬 눈을 비비는 어린 낯은 누가 보아도 갓 기상한 형색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즉시 주삿바늘을 빼낸 백현이 걷어붙인 왼쪽 소매를 내리고 싱크대 안에 빈 주사기를 던졌다. 못다 치운 비닐과 바늘 마개, 약물통은 한 데 모아쥐어 자신의 뒷면으로 숨겼다. 자못 잽싸게 처신하면서도 백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예사로운 성색이었다.
“깼어?”
“뭐해요…?”
“아가는 몰라도 되는 그런 거. 많이 졸려 보이네.”
“아니야.”
“뭐가.”
“아가 아니야. 나 안 졸려.”
제법 단호한 대거리였다. 순간 기침처럼 치고 올라온 웃음을 큽, 하고 삼켜낸 백현이 괜스레 코밑을 쓱 훑었다. 푹 자고 일어나 살짝궁 부은 흰 얼굴에 부스스한 꼴이 워낙 앳되어 애 취급 좀 했더니 아니꼬운 듯했다. 동그란 눈 끝이 삐죽 올라가도 여즉 반쯤 뜬 눈꺼풀에 졸음은 낙낙한 기색이거늘, 저런 얼굴로 안 졸리다니. 불퉁한 표정마저도 앙큼하기 그지없었다. 그를 팔짱까지 낀 채 웃으며 구경만 하던 차였다. 애써 부릅뜬 눈을 끔뻑대던 경수가 나른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느짓한 동태였다만, 이대로 차츰 근접해지면 싱크대 속 주사기가 들통날 터였다. 그야말로 제 발 저린 백현이 자연스레 식탁에서 몸을 떼고 경수에게로 걸어갔다.
“그래, 어린이로 승격시켜줄게. 착한 어린이는 얼른 다시 가서 자.”
“뭐 했는지 알려주면요.”
“아무것도.”
“거짓말.”
대뜸 거짓말이라며 부정한 경수가 선홍빛 눈시울을 가늘게 좁혔다. 앞선 가정을 이미 확신하는 태도였다. 하기야 별일 없는 이상 백현은 경수가 자는 누누이 꼼짝 않고 곁을 지켰으니. 의심하는 것도 지당한 일이었다. 나름 정곡을 찌르는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백현이 경수의 규보 앞에 멈춰 섰다. 어느새 키가 큰 건지, 제 콧마루 언저리쯤 오던 아이의 머리가 당장은 눈 밑에 와있었다. 홉뜬 눈으로 올려다보는 경수와 달리 조용하게 내려다보던 백현이 곧은 등허리를 슬쩍 낮췄다. 서로의 눈길이 수평으로 맞아떨어졌다. 두 입술 사이의 거리도 불쑥 가까워졌다. 그대로 고개를 갸웃 꺾으니, 꼭 키스라도 할 법한 자세였다. 이역 예고 없이 닥쳐온 백현에 의해 흠칫한 경수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적당히 하야말간 안색에 잡티 한 점 없이 고운 피부. 날렵하면서도 순하게 처진 눈매 속, 노련히 무르익은 시선. 오뚝 솟은 콧등의 능선은 매끄러우며 얄캉한 앵순은 연지라도 바른 듯 붉은. 그 청초하면서도 성숙한 미안이 바로 코앞이었다.
“경수야.”
더하여 짐짓 자상한 목소리까지. 어느덧 두 주먹을 힘껏 앙군 채 바짝 얼어붙은 경수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나름 까칠한 표정으로 백현을 빤히 맞보지만, 이맛전은 차차 뜨거워지며 두 뺨에는 불그스레한 혈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뭉근하게 흔들리는 두 눈동자에서도 어쩔 줄 모르는 속심이 보였다. 귀여운 것. 오른팔을 느직하게 뻗은 백현이 경수의 뒷덜미를 슬쩍 주무르며 매시근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형이랑 입술까지 비벼놓고도….”
“…….”
“그렇게 못 믿겠어?”
뾰족한 턱 끝을 살살 치켜들자 감춰져 있던 진한 속쌍꺼풀이 드러나며 일순간 눈빛은 농염하게 고조되었다. 묘한 작태였다. 본디 맑고도 깨끗한 면목에서 피어나는 기류가 아이러니하게도 야릇했다. 달리 페로몬을 푼 건 아니었다. 그저 백현 스스로 퍼뜨리는 공기였다. 그에게 어루만져지는 덜미의 모골이 죄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온몸으로 힘을 바짝 준 경수가 무심결 좌우로 도리질을 쳤다. 까치집이 된 흑발이 제법 세차게 찰랑거렸다. 이제금 그의 살갗은 열홍이 만개하여 삭신 곳곳이 함빡 붉었다. 야무지게 움켜쥐어 마디가 돌올하게 곤두선 손잔등 또한 풋딸기 빛깔이었다. 홍조 수줍게 만연한 경수를 낱낱이 눈으로 훑어본 백현이 그제야 싱긋 웃으며 구부린 허리를 폈다.
“그럼 이제 자자. 재워줄게.”
“…… 치사해요.”
“치사해서 설렜나?”
“…….”
설렜다. 작고 어린 가슴 안전에서 쿵쿵 날뛰는 심장과 그로 인해 열 오른 민낯, 빨개진 손끝이 명명백백한 증거였다. 마뜩한 맞대꾸에 할 말을 잃은 경수가 입을 꾹 다물곤 애먼 바닥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로써 앞으로 몇 분 동안 말괄량이는 잠잠하리라. 급격하게 조용해진 경수의 동그란 두 어깨를 양손으로 가볍게 움킨 백현이 잔웃음을 머금은 채 침실로 이끌었다. 그의 뒤꿈치가 떨어지는 곳마다 고목 특유의 싸한 향이 족적처럼 남았다.
***
12월 31일. 한 해의 완벽한 끝자락인 말월 말일이었다. 하여 경수는 이른 아침부터 만면에 번진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소위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사람처럼 실없이 방글방글. 복숭앗빛 입술을 하트 모양으로 그리며 웃고 다녔다. 오늘의 끝을 알리는 자정이 도래하고 나면 마침내 그토록 고대했던 성인이 되었으니까. ‘다 크면 형한테 장가와라.’ 팔 년 전 겨울쯤 들었던 백현의 목소리가 시종 귓전을 감돌았다. 마지막 겨울 방학식을 치르는 담임선생님의 음성도 희미했다. 교내에서의 기억을 회고하라면 아득할 만큼 뇌리는 온통 백현뿐이었다. 기나긴 학창 시절의 종지부라도 아쉬움 따위 만무했다. 오직 성년에 이르러 마음껏 사랑할 일념으로 덜 익은 심장까지 콩콩거렸다. 하교할 때의 고동은 더욱 크게 뛰었다. 달음박질치는 박동만큼이나 마음도 따라 조급해져, 날쌘 걸음으로 제집이 아닌 백현의 자택에 도착했다. 그가 퇴근하려거든 한참 남은 시점이었지만 가슴이 흠씬 들떠 방구석에 콕 박힌 채 잠자코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해서 백현이 자주 입는 삼선 트레이닝복 바지와 하얀 반소매로 갈아입고, 그의 체취를 킁킁 맡으며, 초롱초롱한 눈으로는 더딘 시간의 눈치만 연신 흘깃대던 중이었다. 정오로부터 숫자 네 칸을 건넌 시침이 슬슬 다섯 시를 가리킬 즈음, 띠리릭-. 느닷없이 도어록 음이 울렸다.
부지불식간의 기척에 멈칫한 경수가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돌아보았다. 주로 일곱 시 남짓할 시각에 돌아오는 백현이 퇴근하기엔 지극히도 이른 시각이었다. 누구지? 의문을 참지 못해 거실 바닥에서 일어난 그때였다. 고개를 푹 숙인 백현이 비척비척 거실로 들어섰다. 바깥엔 추위가 기승이거늘,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백현은 넥타이 없이 풀어헤친 셔츠와 정장 바지만 덜렁 입은 차림이었다. 그의 헝클어진 황금빛 머리칼 사이로 엿보이는 안색이 붉었다. 주춤대는 걸음걸이는 척 보기에도 위태로웠다. 당황한 나머지 얼어붙은 경수에게로 비틀거리며 다가간 백현이 그를 대뜸 부둥켜안았다. 마치 너른 품속에 욱여넣듯 와락- 끌어안겼다. 맞닿은 백현의 단단한 몸에서 불길한 열기가 물씬 느껴졌다. 데일 듯 홧홧한 체온과는 반대로 상쾌한 백단향의 페로몬은 순간 터졌다가 또 금방 그치며 아슬아슬하게 풍겨왔다. 오감을 통해 온전히 절감할 수 있었다. 위험하고도 불온한 백현의 상태를.
“… 형, 일단…….”
제게 기대어 축축 늘어지는 백현을 부축한 경수가 그를 소파로 이끌었다. 푹신한 가죽 소파 위에 풀썩. 마치 쓰러지듯 드러누운 백현이 거친 호흡을 연방 토해냈다. 꼭 뜀박질이라도 한 것처럼 실컷 상기되어 헉헉대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백현의 머리맡으로 쪼그려 앉은 경수가 진한 눈썹 끝을 떨어뜨리며 못내 걱정스러운 내색을 비췄다.
“형… 어디 아파요…?”
실로 경수는 무언가로 앓는 백현을 본 적이 드물었다. 흔하디흔한 고뿔마저 걸리지 않는 백현은 본인이 병들면 아이에게 옮긴다고 항시 철저하게 관리하는 편이었다. 더구나, 잔병과는 별개로 러트사이클 땐 진종일 방문을 잠근 채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경수는 미처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아픈 것인지, 혹은 발정을 겪는 것인지. 채 분간하지 못한 경수가 홀로 안절부절못하자, 부산스러운 기척을 느낀 백현이 두 눈을 사륵 떴다.
“… 경수야.”
“응, 왜요? 뭐 필요해요?”
꽉 잠긴 음성이 낮게 울렸다. 고초라도 당한 양 얼핏 쉰 소리까지 섞여 있었다. 문드러지는 듯한 속에 기어코 울상을 지은 경수가 쪼르르 와서는 백현의 왼팔로 마른 두 손을 가지런히 얹었다. 다분히 일상적인 접촉이었다. 달리 묘할 감회도 없을 만큼 단순한 스킨십. 하건만 가볍게 만지는 것만으로도 경수와 닿은 팔뚝이 찌릿했다. 오메가의 페로몬과도 가까워진 탓에 온몸을 화끈화끈이 점령한 열감도 더욱 치솟았다. 한층 가쁜 숨을 내쉬며 목전의 경수를 가만 응시하던 백현이 돌연 싱거운 웃음을 피식 흘렸다. 저를 어찌 해주지 못해 안달 난 표정으로 울먹이면서도, 작달막한 머리를 갸웃대는 경수가 눈치 없이 퍽 귀여웠다. 하여간 이런 때도 예쁜 짓만 골라 하지. 너부러진 오른팔을 느직하게 들어 올린 백현이 경수의 까만 정수리로 손을 턱 얹었다. 그대로 동글동글한 두상을 묵직하게 훑어내리자 결 고운 머리카락이 늘씬한 손가락 사이사이 흘렀다.
“부엌 첫 번째 찬장에서 약 좀.”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짐짓 여유로운 척 웃으며 쓰다듬어주지만, 내심은 달랐다. 당장에라도 제 손금을 간지럽게 메꾼 흑발을 움켜쥐어 입 맞추고 싶은데, 그리하여 마르다 못해 타들어 가는 속의 갈증을 함빡 축이고만 싶은데. 일말의 방심으로도 폭발할 듯한 자신의 페로몬과 함께 기껏 삭히고 있었다. 한편 손끝에 감춰진 음심을 깨닫지 못한 경수는 마냥 비장한 낯꽃이었다. 결연하게 한번 주억인 경수가 벌떡 일어나서는 후다닥 부엌으로 향했다.
앞선 백현의 부탁대로 첫 번째 찬장을 벌컥 열자, 옹기종기 즐비한 플라스틱 통 몇 개가 보였다. 아예 포장도 뜯지 않거나 팔 할은 넉넉하게 남은 영양제들이었다. 개중에는 비타민도 간간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둘 꺼내어 표면에 부착된 설명서를 읽고 차근차근 솎아내던 중이었다. 이제금 휑하니 빈 듯한 찬장에 마지막으로 팔을 뻗은 경수가 불현듯 큰 눈을 한 번 끔뻑였다. 민둥한 지첨을 통해 색다른 감촉과 무게가 느껴졌다. 달그락. 전에 없이 가벼운 알약 소리도 들렸다. 한 줌에 다 잡힐 만큼 작은 통을 꾹 거머쥔 경수가 치뻗은 팔을 스르륵 내리곤 목하의 약통을 확인했다.
의약품 설명란에 잔글씨로 가지런히 적혀진 [우성 알파 전용 호르몬 억제제] 그나마 약다운 약이란 이뿐이었다. 그 얘기인즉슨 작금에 백현이 앓고 있는 게 이른바 러트사이클, 알파의 발정이라는 답이었다. 언어조차 잊은 채 우두커니 서, 약통만 내려다보던 경수는 회고했다. 이따금 남몰래 위태로이 흔들리던 백현을, 그때마다 뒤돌아서 삼켜내던 순백색 알약을, 애써 숨기지만 팔뚝에 점점 늘어나는 핏빛 주사 자국들을. 그 직후엔 꼭 음산하게 풍겨오던 죽은 백단향의 싸한 시취. 강제로 꺾인 나무의 절리에서나 내밸 법한 진액 향기가 혹 억제제나 안정제를 과다 투여해 나던 것이라면…… 분명, 백현에게 해로웠다. 차분히 판단을 마친 경수가 자그마한 통을 꽉 움켜쥐었다. 그렇담 백현에게 가져다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독을 내미는 짓이었으므로, 어디에든 감춰두고자 손에 쥔 억제제를 들고 막 뒤 돈 참이었다.
“뭐해.”
돌아서자마자 맞닥뜨린 인영에 의해 기겁한 경수가 헛숨까지 힉 들이켜며 움츠렸다. 용케 기척 한 점 없이 다가온 백현이었다. 때가 되었으나 부탁한 약을 갖고 오지 않으니 불편한 몸을 어거지로 끌고 손수 찾으러 온 기세였다. 발그레한 안색에 멍하니 풀린 눈으로 색색대던 백현이 경수의 손으로 시선을 스르르 내렸다. 설익은 손에 쥐어진 하얀 약통의 외관이 익숙했다. 심중 간절하게 찾던 자신의 억제제였으니. 단박에 알아본 그가 약을 가져오려 경수에게로 팔을 뻗었다. 길쭉한 검지가 통에 닿기 직전, 별안간 한 걸음 멀찍이 물러난 경수가 백현의 억제제를 등 뒤로 숨겼다. 뜻밖의 행동에 멈칫 굳은 백현이 느리게 눈길을 올려 멀어진 경수를 내다보았다. 웬일인지, 마주한 경수의 형색은 완강했다. 치뜬 눈빛은 견고하며 앙다문 입술은 고집스러운 게, 언뜻 봐도 뺏기지 않으려는 태세였다.
“…… 내놔.”
뻗은 손을 펼쳐 보인 백현이 짤막한 언사로 요구했다. 썩 엄하게 내리깔린 목소리였다. 그간 자상하기 그지없는 백현이었던 터라 그가 성색만 딱딱히 굳혀도 경수는 은연히 순순해지곤 했다. 하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비록 큼직한 눈망울엔 투명한 물빛 한 겹 둘렀되, 독하게 지르문 입술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어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회답이었다.
“어서.”
“싫어요.”
재촉해서야 꾹 닫힌 말문은 열었다만, 이역 단호한 거절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더욱 가늘게 뜬 백현이 별안간 태세를 바꿔 팔을 거뒀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대관절 한시가 조급한 상황이었다. 한갓 날짐승에 가까운 무언가가 그의 턱밑까지 기어올랐으니 이젠 머리까지 포식할 차례였다. 그 전에 얼른 억제제를 삼켜야만 하거늘. 고열이 뜨겁게 녹은 숨을 게워낸 백현이 결국 경수에게로 다가갔다. 거침없는 접근이었다. 일순 당황한 경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성큼 가까워지는 폭만큼 경수 또한 매한가지로 성큼 달아났다. 그러나 한정된 공간에서 도망은 아주 무용한 대처에 불과했다. 곧 아일랜드 홈바에 허리께를 부딪친 경수가 우뚝 멈춰 섰다. 가로막혔다는 당혹감을 느낄 틈 따위 없었다. 재깍 두 팔을 뻗은 백현이 경수의 양 옆구리 너머 홈바를 짚고 포위했다. 등 뒤엔 붙박이식 가구가, 좌우와 정면엔 백현이 우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꼼짝없이 갇혀버린 경수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백현의 아득한 고동빛 홍채가 저를 관통할 듯 명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정결한 외관에서 물씬 배어난 낯선 위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아가.”
가령 금수가 목을 울리듯 백현이 으르렁거리는 음색으로 경수를 불렀다. 아가. 태곳적부터 유구한 애칭이었다. 늘 장난스러울지언정 기저에 깔린 순애가 살갑게 느껴지는. 따라 더러는 애틋했던 그 호칭이, 이처럼 음험했던 적 있었던가.
“착하지? 충분히 뺏을 수 있는데도 손 안 대는 거야 지금.”
“…….”
“내놔.”
알고 있었다. 실상 백현은 달리 뺏을 수단이 없어서 말로만 타이르는 게 아니었다. 그가 힘을 쓴다면 제 아집 따위는 금방 꺾이고 마리라. 다만 그러지 않는 까닭은, 본인의 완력을 함부로 행사하길 꺼리는 탓이었다. 대상이 도경수라면 더더욱이. 등 뒤로 비닉한 약통을 배로 힘있게 붙든 경수가 느지막이 말문을 뗐다.
“… 싫어.”
알고 있다 한들, 싫었다. 동감할 수 없었다.
응당 세상 무엇보다 저를 아끼고 가없이 애지중지하는 백현은 기뻤다. 쑥스러운 심보에 괜히 과보호라며 유난이라며 톡톡거릴 때도 잦았으나 그의 한도 끝도 없는 내리사랑이 무한하게 느껴져 황홀했다. 하되, 저로 인하여 백현이 헌신하는 것은 싫었다. 그가 스스로 살을 깎고 고혈을 짜내는 짓은 결단코 원치 않았다.
“도경수, 경수야.”
“싫어. 안 줄 거야.”
왈칵 북받친 경수가 도리질까지 설레설레 쳤다. 아무리 다그쳐도, 달래봐도 돌아오는 것이라곤 에굳은 거부뿐이었다. 더운 한숨을 헉하고 토해낸 백현이 고개를 맥없이 떨궜다. 더는 정상적인 사고도 불가했다. 머리끝까지 찬 고양감만큼이나 희박해진 이지, 그 조막만 하게 남은 이성만 제하고 논하자면 진즉 알파로 변질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먼 홈바만 억세게 붙든 채 버티는 그의 손끝은 이제 희다 못해 파리할 지경이었다. 일찌감치 통제를 벗어난 몸이라 완력조차 쉬이 조절할 수 없었다. 설령 경수가 다칠까 싶어, 털끝 하나 건드리기도 두려웠다. 사면초가였다. 어금니를 부술 듯 악문 채 맨바닥만 굽어보던 백현이 불식간 머리를 번쩍 치켜들고 경수와 눈을 맞췄다. 햇빛을 닮은 머릿결이 황금색으로 찰랑거렸다. 그 아래 땀으로 말갛게 젖은 청초한 얼굴은,
“아가, 제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처연히 애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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