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roXXer : not just brothers

[백도] broXXer - 5

멀쩡하던 눈앞으로 돌연 튜베로즈의 하이얀 꽃잎들이 함박눈처럼 우수수 낙화했다. 순백의 꽃밭이 목전을 창백하게 메꿨다. 마치 후각을 통해 곁든 월하향의 씨앗이 폐부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삽시간 만에 싹트고 흐드러진 듯했다. 미지근한 피를 홧홧하게 달구고 냉엄한 이성의 숨을 옥죄는 향내. 휘청한 백현이 급하게 벽을 짚으며 입가를 틀어막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한 전류가 관통했다. 예민한 아랫배도 저릿해졌다. 이만치 강하고 선명한 페로몬을 직격으로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필시 저와 같은 우성이었다. 웬만한 열성 페로몬은 힘껏 개방한다고 해도 우성의 세포를 자극하긴 어려웠다. 어지러운 의식과 희뿌옇게 들뜬 시야를 겨우 다잡은 백현이 눈동자만 굴려 불청객을 노려본다. 그는 아직도 꾸역꾸역 칸막이를 넘으려 하고 있었다. 이지를 완전히 놓은 동태였다. 성큼성큼 다가간 백현이 변기 커버 위에 올라선 불청객의 뒷덜미를 오른손으로 바짝 움켰다. 그대로 끌어내리자 균형을 잃은 녀석이 우당탕거리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땅을 딛고 서는 것도 어려운지 녀석은 갓 태어난 짐승인 양 크게 절룩거렸다. 그러한들 백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제 뒤에서 다리를 절든 말든 억센 악력으로 질질 끌고 가 화장실 밖으로 내던지듯 쫓아냈다.

복도의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엎어진 불청객이 흐느적거린다. 백현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눈빛이 탁했다. 하물며 초점을 상실한 동공과 절제를 잃은 페로몬까지. 사욕에 패배한 인간은 들짐승과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애라서 이해는 하고, 나이를 먹으며 본능에 사로잡힌 군상쯤은 더러 본 적 있으나 새삼 불쾌했다. 그러한 몰골로 떠날 생각은커녕 되레 부스럭거리며 일어난 녀석이 다시금 화장실로 향한다. 비틀비틀 휘우듬한 다리가 백현을 천천히 지나쳤다. 거 손 참 많이 가는 애새끼네. 잠자코 서 있던 백현이 불청객의 멱살을 잡아 바닥으로 팽개쳤다. 방금보다 더욱 드센 힘에 내동댕이쳐진 그가 비로소 으르렁거렸다. 곱게 가라며 등을 두 번이나 떠밀어 줘도 대드는 꼴이었다. 슬슬 짜증이 돋았다. 깔뜬 눈으로 가만 내려다보던 백현이 한 손으로 검은 넥타이를 끌렀다. 이어 빳빳한 셔츠의 윗단추를 두 개까지 풀자 내리 가려져 있던 길고도 매끈한 목이 드러났다. 어지간하면 특질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애새끼가 하도 끈질기니 끊어내려거든 별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쉰 백현이 페로몬을 개방했다.

막대한 양의 향기가 대번에 쏟아졌다. 우성 알파의 체내에서 방류된 페로몬이 복도를 넘치게 에웠다. 공기의 밀도보다 높은 페로몬에 숨통이 콱 막혔다. 기도가 따끔거리며 죄어들었다. 파리하게 질린 불청객이 목을 감싸 쥐고 콜록댄다. 일그러진 인상으로 캑캑거리며 바닥을 기는 것이 퍽 괴로워 보였다. 하기야 녀석은 열성이었으며, 알파와 알파 사이 페로몬은 경계나 공격으로도 작용 가능했다. 더불어 백현의 현재 페로몬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흡사 타는 듯한 나무 냄새. 지극히 냉혈한의 낯으로 일관하나 그 속에선 붉디붉은 화마가 활활 날뛰고 있었다. 당장 등 뒤에 경수가 저를 기다린다는 조급함, 각별히 아끼는 대상을 해했다는 적개. 분과 증오감이 들끓었다. 다만 유교 국가의 연장자로서 체면을 지키고 자비를 베푸는 중이었다. 부지불식간 번뜩 총기를 되찾은 불청객이 허둥지둥 일어나 복도 왼편으로 달아난다. 여즉 꾸물댄 것이 무색하도록 잽싼 움직임이었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그를 확인해서야 페로몬을 갈무리한 백현이 재개 화장실 내부로 향한다. 뚜벅뚜벅……. 고상한 구둣발 소리가 화장실 가장 끝 칸을 앞에 두고 멎었다. 나무판자로 이루어진 문 너머부터 튜베로즈의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유독 진한 향은 피부로도 흡수되었기에 아무리 코와 입을 막아도 면제받을 수 없었다. … 이런 건 안 귀엽네…. 검은 슬랙스 주머니에 양손을 낀 채 우두커니 서 있던 백현이 천천히 고개를 젖힌다. 전율이 괸 하복부가 자릿자릿하니 간질거렸다. 마치 러트사이클이라도 온 것처럼 제풀에 열이 끓으며 아랫도리로도 은근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의 페로몬에 끌리는 것은 다분히 자연스러운 순리였으므로 몸은 진즉 반응하고 있었다. 하나 작금만은 배덕하게만 느껴졌다. 십수 년을 키우다시피 돌본 아이에게, 발정하고 있었으니. 정면의 하얀 천장을 지그시 응시하던 눈이 스르륵 감긴다. 지척이 몽롱하게 이지러져 현기가 돌았다. 견뎌야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수어 번이나 속을 다잡은 백현이 문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경수를 불렀다.

“…… 경수야.”

“…….”

“문 열어.”

은은하게 흐르는 나무 향과 더불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적막을 살랐다. 지금껏 입까지 틀어막고 숨만 시근거리던 경수가 작달막한 머리를 번쩍 치켜든다. 귓전이 윙윙 울려도 음성의 주인만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토록 간절히 고대한 백현이었다. 문을 향해 팔을 뻗은 경수가 떨리는 손끝으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탁’ 소리 이후 느릿하게 열리는 문틈, 협소한 바닥에 틀어박히듯 잔뜩 옹송그린 경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린 눈가와 젖살 어린 뺨, 코끝까지 점점홍 발갛게 익은 얼굴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덧입고 있었으나, 두려움 가득한 눈동자 아래로 트인 눈물길은 가면의 균열처럼 뚝뚝 흐르고 있었다.

잠자코 그를 바라보던 백현이 한 걸음 다가간다. 그러자, 경수는 오히려 좁혀진 거리만큼 물러났다. 여분의 공간도 없는 데다 기댈 곳이라곤 구원처럼 달려와 준 백현뿐이거늘. 그와 멀어지고자 탈력한 두 다리로 부단히 애를 썼다. 전신을 집어삼킨 변화가 못내 무서웠다. 전례에 없었던 괴이한 무언가가 제 세상의 저변을 갈아엎고 무자비하게 활짝 꽃피고 있었다. 탄생한 이래 줄곧 믿었던 축이 뒤틀렸다. 중력은 발칵 엎어져 궤도까지 어지럽게 엉켰다. 비발현성 돌연변이. 상례의 삶에 고착된 베타가 돌연 이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오메가로 반전된다는 건, 안주하던 세계가 붕괴되고 미지의 자재를 통해 불확실한 터전이 창건되는 것이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제부터 사뭇 다른 결의 미래가 놓일 것이다. 그 공포의 수심은 실상 백현조차 헤아릴 수 없는 깊이였다. 선뜻 움직이지 않고 고여 있던 백현이 제자리에 앉는다. 그래도 겁에 사무친 아이의 심정은 알기에, 그가 두 팔을 벌렸다.

“형한테 와.”

“나… 나 지금 이상해요…….”

“하나도 안 이상해.”

“…….”

“얼른.”

퍽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어투였다. 그예 망설이던 경수가 파르르 떨리는 몸을 꾸역꾸역 이끈다. 팔다리가 후들거려 좀처럼 균형을 잡기 어려웠다. 하여 자세를 낮춘 채 엉금엉금 다가간 경수가 이윽고 백현의 열린 품속으로 무사히 안겼다. 이제야 자신의 영역 안에 돌아왔다. 저보다 아담한 몸이 더 깊게 들어오도록 다부진 팔로 꽉 끌어안은 백현이 좁은 등짝을 나긋이 토닥였다.

“잘했어, 아가.”

“흐으…….”

“잘 버텼어. 이제 형이랑 집에 가자.”

부러 평소 같은 높낮이로 붉게 영근 귓가에 속삭였다. 흥분한 속을 들키면 아이가 더욱 놀랄 테니. 침착하게 이르자 경수가 연신 끄덕인다. 커다란 두 눈을 질끈 감고 정신없이 머리를 흔드는 게 꼭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자상한 손길로 경수를 다독이던 백현이 외투를 벗어 그의 둥근 어깨 위에 덮어준다. 검은 코트가 경수의 덜 자란 몸집을 너끈히 에워쌌다. 아이에게 익숙할 자신의 향으로 안심시킴과 더하여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는 월하향의 페로몬을 일부라도 제지하기 위해서였다. 제게 맥없이 늘어진 경수를 번쩍 안아 든 백현이 화장실의 뿌연 간유리 문을 등으로 밀고 나섰다. 통화 말미 즈음 뜨겁다며 중얼거린 대로 안고 있는 몸엔 열기가 수북했다. 두꺼운 코트 너머로도 느껴지는 고열이었다. 가쁜 걸음으로 본관을 나선 백현이 구령대 앞 덩그러니 주차된 아우디로 당도한 참이었다. 누군가 차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정문 쪽 수위였다. 부지불식간 허락도 없이 교내에 침입한 차주를 기다린 듯했다. 예상한 상황이었다. 영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입을 떼는 수위보다 먼저 말문을 연 백현이 예사로운 성색으로 일렀다. 준비라도 한 양 의례적인 문장이 유수처럼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3학년 7반 도경수 학생 보호자입니다. 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왔고 그쪽 차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아, 예…?”

“차 문이요.”

그의 빠른 맥락 전환을 따라가지 못한 수위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되묻는 것이 성가실 법한데도 다시 한번 단언해주는 백현은 무덤덤했다. 다만 처음보다 친절하지 않을 뿐. 당황한 수위의 시선이 그보다 밑으로 향한다. 아우디 주인으로 짐작되는 미남자의 품에 폭삭 안긴 학생은 맥없이 눈을 감은 채 숨만 쌕쌕대고 있었다. 그 앳된 얼굴이 눈에 띄게 불그스름했다. 척 보기에도 심각한 낯빛을 확인한 수위가 백현의 언질대로 허둥지둥 아우디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뭐…….”

열린 조수석 안으로 경수를 조심스럽게 앉힌 백현이 뒤이어 그의 등받이도 대신 젖혀준다. 나부죽하게 펴진 좌석을 따라 경수의 달뜬 몸도 눕혀졌다. 조금만 더 버티자. 얇은 입술이 경수에게만 들리도록 조그맣게 속살거렸다. 용케 알아들은 경수는 미미하게 주억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준 백현이 곧장 차 열쇠를 꺼내어 운전석으로 향했다.

“고생하세요.”

상투적인 인사치레 직후, 턱 하고 닫힌 운전석 문에 미처 대꾸할 겨를도 없었다. 재깍 시동이 걸린 아우디가 속히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으레 왼손으로는 핸들을 쥔 백현이 오른손으로는 경수의 손을 다잡아준 채 액셀을 밟았다. 이로써 한시름 놓는 듯해도 실상은 아직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무한하게 터져 나오는 튜베로즈의 향은 백현의 얼마 남지 않은 이지를 갉고, 계속해서 이글거리기만 하는 고열은 경수를 좀먹고 있었으니.

“아, 으으… 형…….”

“…….”

“… 나, 나 좀… 아….”

쇠한 정신력으로 인내를 거듭해 겨우 여태까지 버텼으나 한계였다.

일순 여린 목덜미를 탁 젖힌 경수가 짙은 눈썹을 축 늘어뜨린다. 붉은 입술도 벙끗 열렸다. 벌어진 앵순 틈으로 낯부끄러운 신음과 무더운 숨이 토해졌다. 한껏 상기된 경수가 덜덜 경련하는 손으로 배꼽 아래 옷깃을 꾹 그러쥔다. 단정한 손아귀 안에 구겨진 교복 조끼와 셔츠가 말려들었다. 얼핏 사정감과 비슷한 쾌락이 단전 가득 득실거렸다. 내외가 죄 엉망이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추스를 수도, 감당할 수 없는 흥분과 열락이 부풀 대로 부풀어, 이제금 누군가 황홀의 꽃망울을 힘껏 터뜨려줬으면 했다. 투명한 유체로 축축하게 풀린 두 눈이 백현에게로 향한다. 얄캉한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지르문 백현은 기껏 정면만 주시한 채 경수를 외면하고 있었다. 하나 그와 맞잡은 손은 위태로이 떨렸다. 백현의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고목의 뿌리처럼 돋아났다.

“흐읏… 제발, 요…….”

절로 휘어진 허리가 시트지 위로 달싹였다. 제멋대로 오므라지는 다리 사이, 가장 비밀스럽게 꼭 다물린 음부가 간지러웠다. 그곳에서 기어코 정액 같은 체액이 내배었을 때. 밑이 젖어 듦과 동시 순결한 살갗으로부터 월하향 꽃잎이 확- 짙어졌다. 척추부터 뒷골까지 소름이 오소소 치솟았다. 선뜩하도록 탐스러운 향.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오메가에 달했다는 방증이었다. 마침내 온전히 발현을 마친 경수가 야릇한 갈구를 수놓는다. 형, 형. 물기 흥건한 목소리로 안달하고, 자신을 범하도록 서슴없이 부추긴다. 나 형이 필요해요. 형도 내가 필요하잖아, 응? 처연한 악력으로 백현의 소매를 붙든 경수가 손길을 졸라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누군가 툭 치면 부글거리는 뇌의 기능이 꺼지고 곧바로 경수에게 달려들 것만 같아, 사력을 다하여 억누르고 있었다. 지금껏 제 손으로 애지중지한 아이라며, 아직 지켜줘야 할 어린 미성년이라며. 애원하는 경수의 손을 꽉 잡고, 제 혈관 속에선 이미 짐승처럼 날뛰는 알파의 피를 증오하며. 짓눌린 입술의 여린 살점이 찢어지도록 억정하던 그때였다.

“… 안아줘요. 나 안아줘 제발….”

“…….”

“백현이 형…….”

제 이름을 부르는 찰나, 머릿속이 시허옇게 질렸다. 반사적으로 갓길을 향해 핸들부터 꺾은 백현이 브레이크를 확 밟았다. 끼이익-! 스키드마크 특유의 새된 소음을 사납게 내지른 차체가 덜컹 멈췄다.

“…….”

운전대를 꽉 그러쥔 왼 손잔등에다 이마를 기댄 백현이 멍한 낯으로 숨만 몰아쉰다. 방금 무언가 확 수축하여 창백하게 죄어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길귀에 멈춰있었다. 몽롱했다. 야트막한 잇새로 오가는 숨결이 거친 것조차 인지하지 못 할 정도로. 하아- 하아-. 잠시간 골몰히 호흡을 고르던 그가 입을 다물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는 무리다.

딱 잘라 판단한 즉각, 센터 콘솔을 짚은 백현이 조수석으로 훌쩍 넘어가 경수의 위로 올라탔다. 제 밑에 잠긴 이를 통제하기엔 최상의 자세로. 비좁은 공간, 극한까지 고양된 온몸이 밀착했다. 상호 달을 대로 달은 아랫도리 또한 매한가지였다. 바지 속 이미 딱딱하게 불거진 치부끼리 맞닿았다. 잔뜩 발기한 그곳으로 미약한 압박감이 전해지자 “읏….” 시종 묵묵하던 백현에게서도 짓이겨진 신예가 샜다. 갖은 감각이 과민하게 곤두서 순전히 옷깃만 스쳐도 미칠 노릇이거늘. 목전에선 커다란 눈망울만큼이나 큼직하게 빚어진 유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새붉은 시울을 투명하게 적신 경수가 두 팔을 뻗어온다. 제게 안기고자 복숭앗빛 통통한 입술을 헤 벌리고 날짝지근하게 웃는 얼굴이 앳되어, 묘하게 순수하면서도 불순한 자태였다. 한 편으로는 은근히 기대감에 찬 눈빛이 설핏 귀엽기도 했다. 마주 바라보던 백현도 슬며시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늘씬한 검지로 경수의 발그레한 뺨을 톡 건드린 그가 잠긴 목소리로 은밀하게 물었다.

“좋아?”

“응, 으응 빨리.”

음란한 행위를 독촉하는 음색이 흡사 어리광을 피우는 듯한 투였다. 숨을 뱉으며 더욱 진한 미소를 띤 백현이 자신의 목에 걸린 경수의 두 팔뚝을 잡고 떨어뜨린다. 유난히 가느다란 손목을 한데 모아쥐고 헤드레스트로 짓누르자 경수의 두 눈에 웃음기가 걷히고 미동이 인다. 정염에 취한 몸짓을 받아주는가 싶던 제가 역으로 포박하여 의아한 모양이었다. 의문에 찬 시선을 뒤로하고 남은 손은 뒤로 뻗어 조수석의 글로브박스를 열었다. 다짜고짜 손끝에 잡히는 비닐을 집어 눈앞으로 가져오니 깨끗한 비닐 속, 주사기 겉통에 담긴 투명한 약액이 찰랑거린다. 이따금 급작스러운 발정을 맞았을 때 비상적으로 주입하는 안정제였다. 제 손에 들린 작은 주사기를 발견한 경수가 울상을 지은 채 부스럭댄다. 원하는 대로 안아주지 않을 것을 직감한 듯했다.

“아니야 형, 형… 나 안아줘, 만져줘요….”

“씁, 가만.”

“아아… 싫어, 싫어요. 형… 제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경수가 힘으로 안 되니 간절한 표정으로 도리질을 친다. 하나 무용한 반항이었다. 제 아래에 깔려 바둥거리는 그를 내리누른 백현이 주사기의 하늘빛 바늘 마개를 이빨로 물어 제거했다. 실낱같이 가느스름하면서도 단단한 주삿바늘이 드러났다. 활성화된 호르몬을 직접적으로 억제하는 약물이기에 꺼렸지만 저마저도 위기인 터.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피 맺힌 입술을 혀로 축인 백현이 경수의 손을 살핀다. 얄따란 손목을 꽉 틀어쥐고 있던 덕에 살집 없는 손등의 푸르스름한 핏줄은 잘 도드라져 있었다. 개중 가장 돋보이는 줄기에다 주사기를 겨눈 백현이 짤막하게 경고했다.

“따끔하다.”

“으…!”

바늘의 첨예한 침선이 하얀 살을 뚫었다. 정확히 핏대로 꽂은 뒤 엄지누름대를 꾹 누르자 주사기 내부의 고무 패킹이 눈금을 점차 잡아먹는다. 따라 겉통 속 약물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혹 혈관을 앓을까 느리게 투약한 이후로도 체내에 약효가 돌 때까지 꼬박 15분. 그 시간 동안 백현은 이미 움터버린 자신의 육욕마저 미뤄두고 어렴풋하게 흐느끼는 경수를 달랬다. 이제 다 괜찮아, 이제 안 괴로울 거야. 조용하게 읊조리는 백현의 음성을 자장가 삼은 양, 경수가 목직이 부은 눈꺼풀을 더디게 끔뻑인다. 흥분했던 만큼 안정되니 졸린 낯색이었다. 한풀 꺾인 그의 기세처럼 하릴없이 쏟아져 나오던 월하향 페로몬도 시들어가고 있었다. 진을 죄다 소모한 백현이 경수의 판판한 가슴팍에다 이마를 기댄다. 쿵쿵, 잦아든 고동이 전해졌다. 숨을 내쉬느라 오르내리는 폭도 좀 전보다 훨씬 잠잠했다. 호흡음과 열 또한 고르게 가라앉은 걸 보니, 자못 진정된 낌새였다.

“형…. 형-….”

으레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던 저음이 당장에는 깨질 듯 유약하게 들려왔다. 긴 한숨을 후- 게워낸 백현이 고개 들어 경수의 검은 앞머리를 쓸어준다. 반듯한 이맛전이 식은땀으로 미미하게 젖어있었다. 아직도 아가처럼 희뽀얀 만면이 한 겹의 물빛을 머금어 촉촉했다. 그런 경수의 말간 뺨으로 입술을 묻은 그가 낮게 응했다.

“… 고생했어, 아가.”

대답이 돌아와서야 물기로 흥건한 두 눈을 내리감은 경수가 편히 새근거린다. 속을 공전하는 약 기운에 삭신뿐만 아니라 의식도 노곤하게 늘어졌다. 눈꺼풀을 닫자마자 그대로 까무룩. 수면에 빠진 경수가 축 늘어졌다. 그를 내내 지켜보던 백현 또한 비로소 운전석에 무너지듯 옮겨 앉았다. 아찔했던 고비가 끝났다. 무려 두 시간 남짓 고공에서 외줄이라도 탄 심정이었다. 맥이 풀려 너부러진 채 가만있던 백현이 오른쪽 소매의 은빛 커프스를 풀고 하얀 셔츠를 팔뚝까지 걷어붙였다. 이어 헐겁게 매달린 검은 넥타이를 완전히 끌러낸 그가 팔오금보다 손가락 한 마디 위 상박에다 타이를 감았다. 한 손으로 매듭을 매고 길게 남은 넥타이의 양쪽 끝을 각각 왼손과 이빨로 물어 질끈 동였다. 팔로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네다섯 번 주먹을 앙궜다가 푸는 겸, 조수석 글로브박스로 재개 팔을 뻗어 새 주사기를 꺼냈다. 비닐을 뜯고 보니 그 틈에 큰 혈관의 윤곽도 불룩이 솟아 있었다. 대강 위치를 확인한 후 다시금 넥타이를 풀어낸 백현이 기억 속 혈관에다 침선을 꽂아 넣었다. 엄지누름대를 꾹 눌러 밀대를 끝까지 밀고 바늘을 빼내자, 곧바로 배어난 핏방울이 살결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정작 제 몸에는 뭔가 잘못된 방식으로 투여한 듯했다. 평소보다 깊게 찔렀든, 바늘을 너무 거칠게 뺐든. 온갖 상념으로 심란해 딱히 고찰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렴, 이 정신에 애 몸에다 실수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족하지. 운전석 헤드레스트에 뒤통수를 기댄 백현이 조수석으로 이목을 돌린다. 제 근심의 주범은 세상 모르게 곤히 자고 있었다.

막연히 염두에 두었던 대로였다. 경수가 발현했다. 그것도 저와 얽히면 곤란한 우성 오메가로. 혹 누군가에게 험한 일이라도 당할까 무작정 달려오는 동안, 저라면 견딜 수 있으리라 여겼다. 저라면 엄한 마음 없이 안전하게 아이를 데려올 수 있으리라고. 제가 아닌 타인에게 경수의 안위를 맡길 순 없었다. 하물며 교내 선생도 믿을 수 없었다. 오직 저여야만 했다. 하나 그것은 오만한 안일이었다. 몰아치는 페로몬에 외려 몸이 동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핸들에 머리를 박았던 그 짧은 순간, 더럭 젊은 태은과 갓난 경수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들과의 첫만남이 되새겨지지 않았더라면 제 손으로 경수를 앗을 뻔했다. 그 실지에 의한 여파가 상당히 컸다. 늘 어린아이로만 보았던 경수에게, 반평생이라도 불행이나 해악 따위 모르도록 보살피겠다며 다짐했던 경수에게 끔찍한 음욕을 절감했다. 때문인지 무탈히 지켜주었어도 오롯이 지켜준 것 같지 않았다. 잠든 경수를 물끄러미 주시하던 백현이 두 손으로 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곱상한 옥수 너머 드러난 표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broXXer : not just br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도] broXXer - 7  (0) 2020.04.27
[백도] broXXer - 6  (1) 2020.04.27
[백도] broXXer - 4  (0) 2020.04.27
[백도] broXXer - 3  (0) 2020.04.27
[백도] broXXer - 2  (0) 2020.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