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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XXer : not just brothers

[백도] broXXer - 4

체질이란 인간의 종을 나누는 가장 하위분류의 잣대로. 까마득한 옛날에는 신체에 깃든 특질에 따라 양인, 평인, 음인으로 구분했는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명칭이 알파, 베타, 오메가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여기서 근원된 것이 계급이었다. 역사적으로 월등하다는 알파는 세간의 우위를 차지했고 하등하다는 오메가는 열위에 깔렸다. 위 주장을 덧붙이기 위하여 뭇 학자들은 알파와 오메가의 근육량이나 골밀도 등의 차이를 증거로 장황하게 열거하였지만, 유구하게 정설을 펼친 학자들은 모두 알파들이었고 그동안은 알파만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들의 뒤엔 유능한 베타나 오메가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죄다 알파의 권위를 위한 허식에 불과했다. 신체고 지능이고, 어차피 달에 한 번꼴로 발정이 나는 건 알파나 오메가나 똑같거늘. 사회는 한낱 짐승의 먹이사슬처럼 타고난 태생을 이유로 누군가가 누군가를 짓밟았다. 그것은 어떤 이든 어떤 까닭이든 결단코 정당화할 수 없다. 이와 비슷한 지론을 지닌 사람들이 늘어나며 현 시류까지 도래해서야 체질에 따른 격차는 흐려졌으나 여직 알파는 치켜세우고 오메가는 괄시하는 측면이 세상의 기저에 잔재했다. 타성에 대한 재활을 겪고는 있어도 아직까진 기형적인 속세. 대관절 격동의 시대였다.

때문에, 백현은 그날 이후부터 수시로 경수의 체취와 체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점검은 시도 때도 없었으며 부지불식간에 이뤄졌다. 방심하고 있을 때여야 열을 잡기 쉬웠다. 이를테면 한가로이 티브이를 시청하고 있을 때나 간식을 오물거릴 때, 뜬금없이 경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식사 도중이든 대화 중이든 느닷없이 경수의 덜미에다 코를 박았다. 막 목욕을 마친 뒤에도 개의치 않았다. 욕실에서 벗어난 경수가 잘 마른 수건으로 젖은 낯을 닦던 참이었다. 때마침 침실에서 나온 백현이 대뜸 경수의 등으로 팔을 뻗었다. 주인의 외관만큼이나 곱고 큰 손이 곧은 목의 절반이나 가뜬하게 뒤덮었다.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몸을 바투 붙인 백현이 방금 물기를 닦아내어 촉촉한 뒷덜미에다 코끝을 묻는다. 놀란 경수가 움씰하니 매끈한 손가락이 그러쥔 그의 목을 살살 다잡아 고정했다. 그대로 숨을 깊게 들이켜는 행동에 경수가 발칵 얼굴을 붉힌다. 불과 한 시간 전에도 살 냄새를 맡은 데다, 온몸이 물비누 향으로 덮인 상태였다. 본디의 체취조차 느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행했다. 그만큼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었다. 요즈음 백현은 알게 모르게 곤두선 상태였다.

“…… 형….”

“응.”

“… 미리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

두 손에 덧댄 다습한 수건으로 화끈거리는 만면을 파묻은 경수가 입속말을 옹알거린다. 천성대로 차분하지만 은미한 긴장이 묻어나는 음색이었다. 눈까지 감은 채 오롯이 후각에만 몰두하고 있던 백현이 닫아둔 눈꺼풀을 스르르 연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경수의 작은 귓등이 빨간 홍조로 형형했다. 못내 부끄러운 낌새였다.

“너 어렸을 땐 목욕도 시켜주고 옷도 갈아입혔는데 뭘.”

“입 대고 얘기하지 마요…!”

“그래 그래.”

페로몬을 확인하고자 구부정하게 숙인 백현이 등허리를 바르게 편다. 이어 붙잡았던 목도 놓아주었다. 용건을 마친 터라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이어 양손을 트레이닝복 주머니에 꽂은 그가 경수를 지나치더니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향한다. 식기 건조대에서 꺼낸 컵에다 물을 따르는 모습은 얼핏 예사로웠으나 실상 백현의 뇌리는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평이한 얼굴 속 가로로 길쭉한 눈매가 퍽 날카롭게 뜨였다. 방금도 맡아보건대 향은 없었다. 다만, 이틀 전부터 짚이는 미열이 신경 쓰였다. 분명 평소보다 뜨겁긴 한데, 여지없이 의심할 정도로 뜨겁지는 않은 터라 애매했다. 과민 반응인가. 텅 빈 물잔을 내려놓은 백현이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돌연변이의 전례에 관한 기사나 자료를 샅샅이 찾아보아도 특별한 소득은 없었다. 해봤자 부모의 유전에 국한된 것이 아닌 부모보다 선대의 유전으로 발현되며 때문에 특질은 계산할 수 없다는 정보뿐이었다. 축약하여 이르자면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발현 전엔 알 수 없다는 말이었다. 워낙 희박한 경우인 데다, 평생을 베타로 영위한 이들에게 갑작스러운 발현은 불행인 탓인지. 흔한 인터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전조 증상만 알면 경수의 현 상태와 대조하기라도 하겠건만 그마저도 불가능한 상황. 아직도 제 눈엔 연약한 아가일 적 용모가 겹쳐 보여 지켜주고 싶거늘. 현실은 제게 아이를 보호할 수 없다며 거듭 강조하는 것만 같았다. 이토록 갑갑한 형국에 처했으니 최근 백현의 성정이 날카로워지는 건 응당했다.

“왜 이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요.”

그마저도 경수를 보면 누그러들었지만. 해서 딱히 티가 안 나는 터라 경수는 백현이 예민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느덧 백현의 앞에서 멀뚱멀뚱 올려다보던 경수가 손을 치뻗는다. 무의식중에 힘을 준 미간으로 경수의 동그란 검지가 말랑하게 닿았다. 그제야 인상을 푼 백현이 표정 없는 낯으로 한숨을 푹 쉰다. 짧지만 짙은 탄식이었다. 말끄러미 올려다보던 경수가 진한 눈썹 끝을 살포시 내린다. 걱정스러운 내색이었다. 그와 잠자코 마주하고 있던 백현이 주머니 속에 박아둔 손을 꺼낸다. 느지막하게 올라간 손이 경수의 까만 정수리를 툭 덮었다. 지금껏 침묵하던 백현의 닫힌 입술에 야트막한 틈이 열렸다.

“퇴사하고 싶어서.”

“… 뭐야.”

부러 실없는 대답을 내놓자 경수의 염려스럽던 낯빛이 금방 어처구니를 잃는다. 잇달아 퉁명스러운 어조로 톡 쏜들 백현은 덤덤했다. 그 딴에는 차마 진솔하게 답할 수 없었으므로. 한결 실한 윤곽이 보여야 자신이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지, 무엇을 조심시킬지 확언해줄 터. 뱉은 답과는 전혀 다른 타념을 잇던 백현이 다시 한번 대식한다. 이번엔 두 눈을 감고 떡 벌어진 어깨까지 늘어뜨렸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경수는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나 퇴사하고 싶어 한다고……? 헛된 의문이 들었다.

 

 

 

**

 

 

당장 눈앞에 시작된 방정식을 풀고 싶어도 식이 다 나오지 않은 셈이었다. 문제의 미지수도 채 거를 수 없이 방대했다. 진즉 예방을 시키자니 한창 중요할 시기에 대뜸 실토하여 경수의 일상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없었다. 따라서 백현에게 남은 수라곤 가장 안전하면서도 답답한 ‘시간’뿐이었다. 경과를 지켜보다 명백한 발현 증상이 나왔을 때, 늦지 않은 대처로 안전하게 모면하면 된다. 그리 석려하고자 해도 영 안심이 되질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잠깐만.”

그래서 자꾸만 붙잡게 되었고, 더욱 눈 여기게 되었다. 조수석의 차 문을 열기 직전. 손목에 감기는 악력을 느낀 경수가 멈칫한다. 그대로 돌아보자 마주친 백현이 붙잡은 팔을 당겼다. 가까이 오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또 자신의 몸내음과 열을 재려는 낌새였다. 이제금 너끈히 눈치챈 경수가 눈썹을 살짝궁 들썩이며 물었다.

“오늘도?”

“얼른.”

“세상 성실하네 진짜…….”

못마땅하다는 양 불평하는 어조였다. 그러면서도 백현에게로 트는 몸은 순순했다. 금세 자세를 잡은 경수가 얌전히 두 눈을 감는다. 말로는 튕기면서도 온순하게 기다리는 경수를 보며 픽 웃은 백현이 빨간 안전띠를 풀고 다가간다. 상체의 균형이 기울어지며 옷자락 스치는 기척이 가까워졌다. 상쾌한 백단나무의 향도 물씬 끼쳤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경수가 두근거리는 속을 침착히 가다듬는다. 지금은 어느 정도 예고를 해주었으니, 왈칵 얼굴을 붉히거나 흥분하여 어리숙하게 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닫힌 눈꺼풀 위로 그림자가 진다. 연이어 제 앞머리를 스르륵 걷어내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번엔 열부터 재려나-. 그리 짐작한 차였다. 훤히 드러난 이마로 얄캉한 감촉이 닿았다.

“… 어…?”

예상외의 감각이었다. 반사적으로 감은 눈을 번쩍 뜬 경수가 무심결에 얼빠진 소리를 낸다. 갓 트인 시야로 보이는 것은, 백현의 기다란 목과 정장을 덧댄 가슴팍이었다. 놀란 경수가 경직된 채 휘둥그레 뜬 눈을 크게 끔뻑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 이마에 닿은 게…….

“…… 뽀, 뽀……?”

겨우 짜낸 목소리가 볼품없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끝까지 열감이 훅 차올라 만면이 후끈후끈 뜨거웠다. 좀전의 다짐이 무색한 감응이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입맞춤이었기에.

“온도는 입술로 재야 정확하댄다.”

발개진 이맛전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백현이 나지막하게 대꾸한다. 속삭이는 음절마다 몽긋거리는 입술이 간지러웠다. 꼼질대던 경수의 손이 백현의 검은 코트를 움켜쥔다. 겉옷을 매개 삼아 덜덜 경련하는 경수의 주먹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린 만큼 기민한 살점을 통해 차츰 뜨거워지는 열도도 전해졌다. 꽤 귀여운 반응에 씩 웃은 백현이 입술을 떼고 경수를 놓아준다. 삼 일 전부터 역력했던 열에 비하면 오늘은 비교적 안심해도 괜찮을 수준이었다.

“잘 다녀와라.”

“… 으응….”

한 손으로 얇은 입술이 맺혔던 이마를 감싼 경수가 연신 끄덕인다. 여즉 얼떨떨한 성색이었다. 실로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오랜만에 받아보는 뽀뽀였다.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드물었지만, 백현은 어린 경수의 말랑말랑한 볼에다 뽀뽀해준 전적이 있었다. 연유는 다양했다. 못내 예뻐서, 울어서, 떼써서, 화내서. 뭔들 다 사랑스러우니까. 이번에도 그때와 똑같은 심정으로 행한 것을 알았다. 그저 애틋한 동생에게 해주는 뽀뽀. 지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격하게 울렁거렸다. 금방이라도 가슴 밖을 탈출할 듯 드센 맥동이 늑골까지 스쳐댔다. 하여 경수는 깜빡 잊고 있었다. 여명이 싹트는 새벽부터 고열이 끓어 깨어난 것, 그 탓에 이른 햇귀를 맞으며 해열제를 복용했다는 것.

그 사정을 알 길 없는 백현은 경수의 빗장뼈로 아주 얇게 고인 꽃내음을 맡지 못하고. 채 해소치 못한 불안감을 끌어안은 채, 회사로 액셀을 밟았다.

 

 

 

**

 

 

 

“과잉보호라는 생각 안 들어?”

점심시간이었다. 회사 건물 뒤편, 왼손은 주머니에 끼운 채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선 민석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물었다. 목적어 없이 깔끔한 비문이었다. 하나 백현은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쪼그려 앉은 무릎에 팔을 걸치고 핸드폰 액정만 들여다보던 백현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바로 곁에 서 있던 민석의 깔뜬 눈과 마주쳤다. 여간한 동안이 아닌지라 타 부서 사원들이 자꾸만 초면에 맞먹어 곤란하다더니. 일주일 전부터 시원하게 넘기고 다니는 머리 덕분에 제법 날카로운 미목이 두드러졌다.

“경수한테 쏟는 관심을 지난 애인들한테 반이라도 나눠줬으면 허구한 날 뺨 맞고 헤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남이사.”

“남이라니.”

짤막한 대거리에 민석이 실소를 흘린다. 파- 하고 터져 나온 입김이 삼추 즈음의 쌀쌀한 공기와 맞물려 유독 새하얗게 흩어졌다. 마뜩한 헛웃음이었다. 수년 전 대학에서 만난 민석은 지금까지 인연을 지속하고 있는 친한 형이었다. 같은 경영학과 선배에, 바야흐로 같은 직장 동료까지. 흔치 않게 길고 굵직한 연으로, 백현이 극진하게 감싸고도는 경수와 익히 알고 지내는 것은 물론. 유일하게 놀이공원도 같이 놀러 간 인물이었다.

“이제 경수도 곧 성인이야, 어른이고 자시고 따지기 전에 원래 성숙했고.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손에 쥔 핸드폰으로 이목을 돌린 백현이 환한 액정을 주시한다. 켜진 화면 속엔 경수와의 채팅방이 띄워져 있었다. 밋밋한 하늘 단색 배경에 노란 말풍선보다 조금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하얀 말풍선. [형 오늘따라 저 많이 놀아줘서 좋은데], [바쁘지 않아요? 일에 방해될까 봐] 민석의 말이 맞았다. 어느덧 열아홉으로 성인을 목전에 둔 경수는 속에 깃든 심성이 또래보다 조숙했다. 사춘기에 응당 겪을 법한 방황이나 사소한 탈선마저 지양했으며 교우 관계도 문제없이 곧잘 처신해왔다. 평상시 한껏 앙큼하게 구는 건 오로지 제 앞에서만 내비치는 점을 미루어 공과 사도 꽤 깔끔히 구분했다. 그런 경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랜 세월 간 누누이 지켜봤으니.

“무슨 일 있으면 야무지게 잘 대처할 거야, 아니면 너한테 전화를 했겠지.”

잇따른 부언 또한 지당했다. 한데, 오늘따라 왜 이다지도 뒤숭숭한 건지. 어째서 불온한 감이 사위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늘씬한 검지와 중지 사이에 걸린 담배의 필터 끝을 잘근 씹은 백현이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다. 꺼지지 않은 화면은 여태껏 멈춰있었다. 그곳에 체류한 건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시각 12시 46분. 핸드폰만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현의 밤빛 눈동자가 액정의 하단으로 옮겨간다. [안 바빠] 제가 남긴 노란 말풍선이 떠오른 시각은 오전 11시 13분이었다.

“… 답장이 안 와.”

그 후로 경수는 대답이 없었다.

“너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

“읽지도 않아.”

제 메시지를 미확인했다는 표식도 사라지지 않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백현이 무딘 낯으로 다시 한번 필터를 깨문다. 견리한 잇새에 곧았던 담배의 꽁지가 형편없이 짓뭉개졌다. 지금 시각이라면 고교도 점심시간이었다. 별일 없다면 답장할 여건이 될 텐데도 묵묵부답이었다. 평소보다 낮은 열이라고 느꼈으나 정상 범주에 속하는 체온이었던가. 아니면 저보다 뜨거웠던가. 지난 감각을 의심하면 끝도 없이 왜곡되는 걸 알면서도 자문하던 그때였다. 줄곧 채팅창에 머물러있던 화면이 뒤집히며 수화기 아이콘이 크게 떴다. 그대로 발신인을 확인한 백현과 민석은 동시에 멈칫했다.

[경수]

반가운 이름 두 자를 인식하자마자 조마조마하던 심중에 역동이 멎었다. 상호 회사나 학교에 있을 때 경수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즉시 피우고 있던 장초를 짓밟고 일어난 백현이 비상계단으로 성큼성큼 향한다. 막힘 없이 크고 빠른 보폭이었다. 묵직한 철문을 가뿐하게 연 그가 계단을 내려가며 전화를 받았다. 귓가에 가져다 댄 핸드폰 옆 백현의 표정은 무서울 만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스피커 너머로 불길하도록 밭은 숨소리가 할딱이며 들려왔다. 경수의 것이었다.

-‘… 형….’

울음 짙게 밴 음성이 애처로이 떨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니 체내를 순환하던 피가 발밑으로 죄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지레 예견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충분히 선감할 수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백현이 침착한 음색으로 경수를 타일렀다.

“아가, 진정하고.”

평소와 같이 차근한 어투였다. 하나 대리석과 연신 부닥치는 백현의 구둣발 소리는 긴박하기 그지없었다.

-‘형… 나 무서워요…….’

계단을 빠르게 밟던 백현이 얇은 아랫입술을 질끈 문다. 여린 살점이 억세게 짓눌리며 창백히 질렸다. 무서워요. 경수의 입으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뇌내에 있어야 할 무언가 확 이탈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눈앞도 까마득해졌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니, 짧았지만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왔다. 겨우 이지를 붙든 백현이 지하 2층의 철문을 박차고 내달렸다.

“… 괜찮아, 형 금방 가니까 괜찮아.”

벅차오른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다. 곧장 흰색 아우디의 운전석으로 탑승한 그가 급히 시동부터 걸었다. 왼손의 능숙한 핸들링으로 매끄럽게 주차 구역을 빠져나온 아우디가 속히 출구로 향했다. 한시가 급박한 시점에 위안인 점은 회사와 학교의 거리가 짧다는 점이었다. 차로 15분 내외. 단 한 번도 신호에 걸리지 않고 계속 과속한다면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백현은 짙은 잿빛 아스팔트가 보인 시점부터 액셀을 아낌없이 밟았다. 운전에 몰두한 와중에도 전화는 계속했다. 형 지금 가고 있어, 곧 도착할 거야. 듣는 이마저 아슬아슬하도록 떠는 경수 대신 그의 이성을 다잡아주기 위해서였다. 알파든 오메가든 발현과 동시에 첫 발정을 맞는다. 고삐 풀린 심장은 미친 듯 달음박질하고 덩달아 개방된 페로몬은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며 치솟는 신열은 온몸을 녹여버릴 것처럼 뜨거워졌다. 개중 가장 큰 문제는 지성을 압살할 정도로 솟구치는 성욕이었다. 그토록 위험한 상태가 하필이면 교내에 있을 때 도래했다. 극악이었다. 이역 베타가 압도적으로 많을 테지만 필시 미성숙한 알파와 오메가도 섞여 있으리라. 큰 사거리에서 우회전한 백현이 뻥 뚫린 직선 차도를 아우토반 삼아 액셀을 지르밟은 찰나였다.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느닷없이 ‘쿵쿵!’ 거센 굉음이 귓전을 따갑게 울렸다. 마치 누군가 얇고 딱딱한 판자를 세게 두드리는 소리. ‘아, 문 열라고!’ 뒤이어 큰 고성도 들려왔다. 기겁한 경수가 가느다랗게 흐느낀다. 여태껏 꾹 참았던 울음이 터진 듯했다. 기껏 달래놨더니. 핸들을 꽉 틀어쥔 백현의 왼팔로 두툼한 힘줄이 돋아났다. 씨발……. 안색 한 점 변하지 않되 굳은 얼굴의 백현이 욕을 낮게 뇌까렸다. 어느덧 아우디의 계기판 속 침은 기어코 220km를 넘기고 있었다. 지나친 속력에 몸이 붕 뜨는 감각이 수반되었다.

-‘형, 문밖에… 어떤 애가, 자꾸….’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형 말만 들어, 형이 아무 일도 없게 해줄게.”

-‘으응, 응….’

“어디야 지금.”

-‘흡, 저… 본관 1층, 화장실인데…….’

단숨에 속력을 줄이고 핸들을 좌로 꺾은 백현이 눈시울을 좁힌다. 경수의 고교는 입학식과 참관수업으로 총 두 번의 방문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희끄무레한 뇌리를 더듬어보건대, 본관 1층 화장실이라면 중문 근처로 기억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경로 계산을 끝낸 백현이 익숙한 고교의 정문이 목도하고 속도를 늦췄다. 그대로 교문을 지나친 아우디가 텅 빈 운동장 한복판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미끄러지듯 들이닥친 흰색 차량이 구령대 앞에서 절묘하게 멈춰 섰다. 흙바닥으로 검은 타이어가 거칠게 마찰하여 자디잔 모래바람이 뭉게뭉게 일었다.

-‘… 형, 혀엉…….’

“응 아가, 왜.”

-‘나… 갑자기… 이상해요….’

“…….”

-‘후읏, 뜨거워…….’

녹진한 한숨과 함께 부끄러운 줄 모르고 새어 나오는 신음. 제정신을 가누기 겹다는 방증이었다. 아무래도 문밖에서 소란을 피웠던 불청객의 향을 맡은 낌새였다. 운전석 문을 벌컥 차고 나온 백현이 중문을 향하여 내달렸다. 알파는 오메가의, 오메가는 알파의 향을 맡으면 발정은 급속도로 심해진다. 만일 그로 인해 완전히 도취해버린다면,

“도경수.”

-‘읏, 응….’

“형이 열라고 할 때까지 절대 문 열지 마.”

경수가 위태했다.

가능한 전력으로 뛰어 도착한 본관. 빈 복도 한가운데서 좌우를 살핀 백현이 표지판을 발견하고 우측으로 꺾었다. 뿌연 간유리 문과 가까워질수록 어수선한 기척이 들렸다. 좀 전 통화 도중 언성을 높였던 불청객이 여직 안에 있었다. 하여 급하게 철제 문고리를 잡고 열기 직전이었다. “아악-!” 새된 비명이 들렸다. 일순간 멈칫한 백현이 곧바로 간유리 문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활짝 제친 유리문과 벽끼리 부닥치며 ‘쾅!’ 큰 소음이 빚어졌다. 백현의 핏발 선 눈이 화장실 천장 언저리로 향한다. 누군가의 낯선 등 불쑥 솟아있었다. 맨 마지막 칸에 경수가 있는지, 불청객이 그 칸막이를 넘으려 하고 있었다. 이를 악문 백현이 시원하게 트인 내부로 구둣발을 내디딘다. 좀 전, 가히 문을 박살낼 듯한 파열음을 터뜨린 장본인답지 않게 고요한 걸음이었다. 그렇게 딱, 세 발짝 진입했을 무렵이었다.

방심할 찰나만을 기다렸다는 양, 경수의 앳된 몸속에서부터 풍성히 만개한 튜베로즈가 노기에 눈 먼 백현을 담뿍 덮쳐왔다.

 

       ,

…… 꽃

 

무려 꽃향기를 흘리는 오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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