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XXer : not just brothers

[백도] broXXer - 1

지음_ 2020. 4. 27. 21:24

사람은 선천적인 외로움과 후천적인 외로움을 겪는다. 전자는 하나의 주체로서 응당 평생을 느끼는 순리의 일각인 반면, 후자는 환경적인 요인 탓에 발생하는 감정으로.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 슬하에 외동으로 태어나면 보통은 그 두 가지 외로움을 모두 느낀다. 그래서 유년의 나는 집이 싫었다. 사회 통념적으로 접한 가족의 그림이란 구성원 모두 집안에 아울러 하하호호 웃는데, 제 처지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사업을 하는 어머니, 그의 비서인 아버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기억을 꺼내보라면 어머니의 흔적이 그나마 머무르는 서재 한 편, 쪼그려 앉은 내가 전부였다. 그러한들 부모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모든 건 상황의 탓이라며 그저 순응하고 방황했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마음에 놀이터나 공원, 친구의 집에 들렸다. 그날도 똑같았다. 실컷 떠돌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하오의 태양 아래. 노릇한 색으로 물든 인도를 건너, 어디론가 끌려가는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안녕, 백현아.’

‘…….’

‘…… 아기가 신기하니?’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이를 보았다. 몸은 보드라운 천에 감겨 빼꼼 나온 얼굴이 믿을 수 없이 동그랗고도 자그마했다. 그 안에 오목조목 빼곡하게 담긴 이목구비, 희뽀얀 피부에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밴 뺨. 야밤에나 대면하는 부모에게 차마 조르거나 원하진 못했지만, 내심 닳도록 바랐던 동생의 형상이었다.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던 백현이 느리게 끄덕인다. 여직 넋 놓은 기색이었다.

‘안아볼래?’

곤히 잠든 경수를 빤히 바라보던 백현의 눈길이 그제야 올라간다. 굵은 펌이 곁들어진 단발과 매초롬한 낯색, 크고 둥근 눈매와 도톰한 앵순. 그리고 자상한 미소. 몇 번이나 마주쳤기에 백현은 그녀를 익히 알고 있었다. 맞닥뜨릴 때마다 향긋하면서도 쌉사름한 장미꽃내음을 자아내는 그녀는 바로 옆집에 거주하는 이웃사촌이었다. 요 몇 주간 보이지 않더라니. 품에 아이를 안고 돌아온 걸 미루어 출산 후 다른 곳에서 요양을 취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 그래도 돼요…?’

변성기조차 오지 않은 음성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지금껏 아이를 감싸 안고 있던 태은이 곱절 환하게 웃어주며 주억거렸다. 발그스름한 입술이 하트를 그린다. 큰 눈은 가느스름한 호선으로 휘어졌다. 마른 허리를 수그린 태은이 백현의 작은 품으로 아이를 포대기째 살살 내려준다. 타고난 눈썰미를 통해 한쪽 팔로 아이를 감싸 안은 백현이 연이어 다른 손으로는 아이의 목이 흔들리지 않도록 가볍게 받쳤다. 태은을 한눈에 모방한 것치곤 퍽 안정적인 자세였다.

‘안 가르쳐줘도 잘 하네-.’

‘…….’

‘예쁘지, 우리 경수.’

안는 순간부터 굳어버린 백현이 불그레 상기된 낯으로 경수를 가까이 들여다본다. 상상보다 목직한 무게감이 설익은 두 팔을 짓눌렀다. 사소한 잔동작에도 깨어나거나 울까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다지 불편한데도 마냥 기뻤다. 제게 안긴 갓 난 존재가 압도적으로 사랑스러워, 거동의 불편함 따위 거뜬하게 상쇄되었다.

‘… 네에…….’

태은을 빼닮아 유독 크고 동그란 눈매에 오물거리는 복숭앗빛 하트 입술, 하얗고 보송보송한 피부에서는 향기로운 분내가 은은하게 풍겼다. 코끝을 넘어 두 볼까지 몽클해지는 냄새. 간질간질한 눈살이 절로 접혔다. 새근거리는 경수를 향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백현이 참지 못하고 배시시 웃는다. 얇은 입술이 활짝 벌어져 분홍빛으로 여문 뺨은 봉긋 솟아올랐다. 따라 처진 눈도 매끄러이 휘어졌다. 경이롭도록 조그마하고, 순수하며, 세상 가장 유약한 존재가 제 품 안에서 소록소록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못내 소중하고 어여뻤다. 온 누리에 곱고 꽃다운 어휘만 따다 꼬물거리는 손에 전부 쥐여주고만 싶었다.

‘… 너무… 너무 예뻐요…….’

그래도 모자랄 만큼, 첫 만남 속 경수는 무척이나 귀애로웠다.

이후의 일과는 변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번번이 늑장을 부렸던 백현은 종례가 끝나는 대로 재깍 집을 향해 달려갔다. 매번 마다했던 운전기사도 다시 불렀다. 서둘러 경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귀가하자마자 샤워부터 깨끗이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옆집 문을 똑똑 두드리면, 태은이 기다렸다는 양 ‘백현이 형 왔다’며 온화하게 반겨주었다. 응당한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두근두근 설렜다. 꼭 경수와 형제가 된 기분에 새삼 벅차올랐다. ‘다녀왔습니다.’ 건넬 사람이 없었기에 하지 않았던 인사말은 점차 익숙해졌고, 거실 한복판에서 꼬물대던 경수는 저를 보는 족족 하트 입술로 방끗방끗 웃었다. 대뜸 안아달라는 듯 짧고 통통한 팔다리를 허공에 바동거릴 때도 있었다. 하여 원하는 대로 안아주면 제 옷자락을 꼭 쥐고 솔풋이 잠들었다. 얼굴을 가까이 갖다 주면 작디작은 고사리손으로 제 뺨을 어루더듬었다. 작달막한 면적으로 와닿는 보드라운 살과 따사로운 온기, 아가 특유의 포근한 향기는 딱딱했던 마음을 속절없이 녹여놓았다.

제게 경수는 그야말로 천사였다. 어린 날 찾아온 작고 사랑스러운 구원. 해서 더욱이 비호했다. 네가 나의 위로니까. 내가 지켜야 할 나의 안식이자 행복이니까. 카펫 위를 앙금앙금 기어 다니던 아기가 아장아장 걷고. 유치원, 초·중학생을 거쳐 고교생이 될 때까지. 제게는 늘 첫 만남이 가슴 한편에 깊이 사무쳐 경수를 감싸고돌았다. 이제금 그 또한 다 컸다며 저 스스로 다잡은들, 금방 아가일 적이 떠올라 두 팔을 벌리게 되었다. 그렇게 품고 산지 바야흐로 열여덟 해. 제 순전한 과보호가, 아이에겐 사뭇 다른 결의 사랑을 촉발시킨 도화선이라도 되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경수는 제게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고백하기 시작했다.

“형, 좋아해요.”

마치 지금처럼.

“알아.”

“알면 나랑 연애해요.”

“그건 안 되고.”

야근 후 겨우 외투만 벗은 백현이 소파 위로 길게 늘어지며 대꾸한다. 언뜻 설렁설렁 넘어가려는 양 일상적인 음성이었으나 어림없는 단답이었다. 소파 위로 두 손을 얹은 채 백현을 들여다보던 경수가 갸웃한다. 올해로 열아홉이 된 어린 얼굴은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왜? 다 크면 장가 오랬으면서.”

“내 눈엔 아직 덜 컸거든.”

“… 알 거 다 알면 다 큰 거지….”

“뭘 아는데 네가.”

피로가 켜켜이 쌓여, 묵직한 눈꺼풀을 내리감은 백현이 무심한 어조로 툭 내뱉는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낮게 갈려 나왔다. 회장으로 군림하는 어머니 본사에 낙하산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 기껏 야근까지 마치고 돌아왔더니 이번엔 경수가 말썽이었다. 훗날 성인이 된다 해도 저에겐 언제까지나 어린 아가로 보일 텐데, 여태 교복을 입고 제 딴에는 다 컸다며 삐약삐약 주장하는 꼴이 귀엽기만 했다. 그즈음이었다. 환한 눈꺼풀 위로 난데없는 응달이 불쑥 밀려들더니 이내 제 입술에서 ‘쪽’ 소리가 울렸다.

“… 허-.”

찰나에 불과했으나 방금 스친 말캉한 감촉은 분명 경수의 도톰한 앵순이었다. 가만 누워있다 느닷없이 입술을 갈취당한 백현이 싱거운 웃음을 터뜨린다. 나지막한 소성이 실실 흘러나왔다. 여태 감아두었던 눈을 스르르 뜬 백현이 팽 돌아선 뒤통수를 내다본다. 아무래도 가장 싫어하는 애 취급을 당해 토라진 모양이었다. 저토록 삐쳐서 하는 행동이 뽀뽀라니. 이역 앙큼하기가 짝이 없었다.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가라, 아가야. 장모님 걱정하실라.”

“… 안 된다면서 우리 엄마는 장모님이래.”

“날 사위라고 부르시니까.”

모로 누워 목덜미를 받친 백현이 투덜거리는 경수의 옆태를 바라본다. 댓 발 튀어나온 입술의 윤곽이 평소보다 더 통통했다. 그렇게 삐죽대며 하는 말대꾸라곤 당치도 않은 트집이었다. 이제 와 야료를 부리기엔 경수의 짝사랑만큼이나 유구한 호칭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대략 팔 년 전 겨울. 당시의 백현은 스물하나로 입대를 앞둔 상황이었고. 고작 열한 살이었던 경수는 일주일 내리 백현만 보면 폭삭 안긴 채 가지 말라며 엉엉 울었다. 제 배에다 얼굴을 묻고 훌쩍이는 아이가 귀여워, 그의 작디작은 등을 토닥여준들 소용없었다. 알파의 병역 거부는 중범죄에 속하는 데다 형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거냐며 우스갯소리로 달랜들 무용했다. 연약한 눈가가 벌겋게 부르트고 까져도 닭똥 같은 눈물만 퐁퐁 쏟아냈다. 그 지고지순한 순애를 보며 내뱉은 농담이 시초였다. ‘다 크면 형한테 장가 와라.’ 티끌만 한 진심조차 섞이지 않은 순 빈말이었다. 뭇 사람들의 유년이 그러하듯 어린 경수 또한 사랑의 종류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라 여겼으니까. 즉 백현에겐 그저 장난일 뿐이었던 그 말 때문에, 경수는 꼬박 2년간 호된 열병을 앓았다. 허구한 날 백현의 사진을 품 안은 채 엉엉 울고, 매일 매일 그에게 부칠 편지를 적었다. 하물며 부모님의 동행도 없이 위험하게 홀로 면회를 온 적도 있었다. 그 독한 애집을 곁에서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태은은 막 제대한 백현에게 ‘아무래도 진짜 우리 사위 해야겠다’며 정말 그를 사위라 불렀다. 기실 맞벌이로 바쁜 자신들을 대신해 경수를 먹여주고 재워주며 다정히 보살펴준 옆집 형이니, 마음에 든 지도 한참 오래였다.

그러니까 백현과 경수가 서로 알고 지낸 햇수도 어느덧 18년. 해가 열 번 바뀌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백현의 눈에 경수는 여전한 아기였다. 이제금 혼자 밥을 차릴 수 있고, 혼자 식사할 수도 있고, 혼자 잘 수도 있다 해도. 백현의 뇌리로는 새하얀 포대기에 싸인 아가의 형상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얼른. 입술 집어넣고 일어나.”

마뜩이 받아칠 대거리가 없어 침묵하는 경수에게로 백현이 팔을 뻗는다. 젖살 어린 뺨을 감싸 쥔 채 더듬거리던 그의 곱상한 손이 이내 도드라진 입술을 찾아 꾹 누른다. 마른 손끝이 말캉말캉한 살집에 폭 파묻혔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티브이만 고집스레 응시하던 경수가 그제야 뚱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싫어.”

“… 그래?”

“응, 싫어요. 나 형 집에서 잘 거….”

당돌한 어투로 고집을 부린 차였다. 즉각 반항의 낌새를 맡은 백현이 조용하게 일어나더니, 대뜸 경수의 팔과 허리를 거머안곤 그대로 둘러멨다. 망설임 없는 동작에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단단한 어깨 위로 가뜬히 걸쳐진 경수가 버둥댄다. 해봤자 미숙한 몸인 데다, 또래 중에서도 유독 작고 왜소한 체격이라 기별도 없었다. 안색 한 점 변하지 않은 백현이 덤덤하게 경수를 이고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했다.

“아 싫다고!”

“씁-, 슬쩍 말 놓지 말고.”

“아, 시… 싫다고요…!”

짐짓 심기 뒤틀린 척 으르니 재깍 존댓말로 정정한다. 분명 위축되었으나 기세를 아주 낮추진 않는 것이 제 딴에는 잔망스럽기만 했다. 소리 없이 씩 웃은 백현이 삐뚜름하게 올린 입매로 가벼운 한숨을 탄토했다.

“형이 재워주는 게 그렇게 좋디.”

“아니 그냥 형이 좋은 건데.”

“끼 부리지 마라.”

“… 쳇…….”

야트막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경수가 뾰로통한 소리를 흘리자, 도어록 번호를 척척 누르던 백현이 그의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툭 친다. 느닷없이 둔부로 와닿는 손짓에 흠칫. 하반신을 옴츠린 경수가 실컷 당황한 내색으로 백현을 쳐다본다. 지, 지금 내 엉덩이를……! 동그란 만면 가득 열이 차올랐다. 샛노란 유치원복까지 손수 입혀줬던 백현으로서는 별 뜻 없는 행동이라지만 그를 좋아하는 경수에겐 다분히 부끄럽기만 한 접촉이었다.

“장모님-, 경수 배달 왔습니다.”

현관문을 연 백현이 허리를 수그린다. 여태 옹골찬 어깨 위로 매달려 있던 경수가 신발장을 딛고 섰다. 이제야 백현을 맞볼 수 있게 되었건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알 거 다 안다며 떵떵거린 주제에 고작 엉덩이 한 번 두드렸다고 붉어진 얼굴을 들키기 싫었다. 또 애 취급받을 게 분명했다. 하여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자니, 곧이어 어머니의 음색이 들려온다. “우리 사위-.” 안방에서 잔업을 하다 말고 현관까지 걸어 나온 태은이 두 팔 벌려 백현을 반겼다. 변함없는 외관에, 은연한 생장미 향. 세월이 흐른들 태은은 여전했다. 자연스레 포옹을 받아준 백현이 태은의 작은 몸을 너끈히 싸안은 채 웃었다.

“어제도 뵀잖아요.”

“내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서 그래.”

으레의 편안한 대화가 도란도란 오갔다. 백현의 널따란 등짝을 힘 있게 두들긴 태은이 한걸음 물러나 경수를 힐끗 훔쳐본다. 자그마한 머리를 떨궜으나 발그레 상기된 귓등과 덜미가 엿보였다. 그를 확인한 태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비록 세세한 사정은 모를지언정 또 백현에게 흠뻑 빠지고 온 모양이었다. 귀여워라, 우리 아들. 슬며시 미소 띤 태은이 백현에게 눈짓한다. 애 좀 달래주고 가라는 뜻이었다. 그예 못 이긴 척, 다부진 상체를 숙인 백현이 경수와 눈높이를 맞춘다. 본디 날렵한 눈과 둥그스름한 눈이 지척에서 마주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부리부리한 눈총과 더불어 홍조 띤 뺨도 퉁퉁한 게, 잔뜩 심통 난 표정이었다. 잔웃음 은근한 낯으로 주시하던 백현이 손을 올려 경수의 까만 머리통을 쓰다듬는다. 사근사근한 손길 따라 결 좋은 흑발이 찰랑대며 넘어갔다.

“아가.”

“…….”

“잘 자고 내일 보자.”

자상한 저음과 더불어 다정한 눈빛에 경수의 시선이 흔들린다. 간신히 가라앉힌 미열이 다시금 올곧게 뻗은 목 빗근을 타고 말랑한 귓불까지 화악 도졌다. 급격히 빨라진 고동만큼이나 눈동자를 어수선하게 굴리던 경수가 결국 두 눈을 깔뜬 채 힘겹게나마 끄덕인다. 다 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어른처럼 의연히 굴고 싶거늘. 그 모습을 가장 보여주고 싶은 상대 앞에 막상 서면 연습했던 표정도 죄다 무너졌다. 하여 더는 대면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 있기만 하자 연이어 백현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저와는 달리 여유 낙낙한 소태가 괜히 짓궂게만 느껴졌다.